원형 되찾는 종교개혁, 현재에도 계속되는 ‘진행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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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되찾는 종교개혁, 현재에도 계속되는 ‘진행형 사건’
  • 공종은
  • 승인 2009.11.0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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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강요’ 정통 보수신학의 진수 풍성하게 맛볼 수 있는 책
■ 대담 : 장형준 편집국장 | 2009. 10. 30


492주년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교회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지는 데 반해 교회들은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목회 현장에서, 후학 양성의 자리에서 묵묵히 교회의 부흥과 성숙, 건강성을 위해 노력해 온 백석문화대학 고영민 총장은 라틴어로 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직접 번역해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등 개혁주의 신학자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종교개혁주일을 보내고 칼빈 탄생 5백주년도 저물어 가는 즈음에 고영민 총장에게 한국교회의 문제와 새로운 시대를 향한 교회의 모습을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칼빈이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이후 492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그 열정도 그리고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들도 이제 구호로만 남은 듯 합니다. 4백 년 전의 교회개혁과 지금의 교회개혁,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요?


 - 종교개혁의 원인은 중세 교회의 타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주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던 시점에 닿을 수 있습니다. 그 때부터 교회는 썩기 시작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에는 그 썩은 악취가 최고 절정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이 되면 교회 안팎에서 늘 익숙하게 듣는 구호들이 있습니다. ‘제2의 종교개혁의 불길을 지피자’, ‘교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자’, ‘종교개혁의 정신을 본받자’ 등입니다. 그러나 막상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를 물으면 답변이 흐려지거나 막연해집니다. 원래 개혁을 의미하는 ‘reformati on’이란 말에는 뜯어고쳐서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든다는 것보다는 ‘원래의 원형을 되찾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4백여 년 전에 있었던 종교개혁은 성경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바꾸거나 교회 행정이나 조직을 개편하자는 것이 아니라, 중세 가톨릭교회 시대를 거치면서 잘못되게 덧칠해지고 왜곡된 것을 올바로 잡아 초대교회 이전 성경이 기록된 바로 그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본래의 생생한 뜻을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유독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우려가 강합니다. 세계 교회의 흐름에도 편승하지 못하고, 극단적 보수화와 친 정부 행태로 인해 사회로부터의 지탄이 극에 달했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실,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 사실상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많이 빗나간 점들이 있습니다. 본래의 순수한 성경말씀으로 되돌아가기보다는 각종 행사나 프로그램에 의한 교회 성장이나 현대인의 취향에 맞춘 예배 형식, 그 밖에 사회 구원과 연관된 사업이나 타 종교와의 대화 등과 같은 지엽적이고도 외형적인 면에 더 관심을 쏟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초대교회는 말씀 그 자체에 충실했고 말씀 그대로 실천했을 때 하루에 오천 명씩 교인수가 증가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한국교회에 요청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었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면서 4백여 년 전의 종교개혁, 아니 2천 년 전의 그 현장의 되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중세기 어느 시점에 있었던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적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늘 변하고 개혁해야 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을 전승하는 교회의 사명인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개혁의 요구는 곧 좌파로, 교회를 대적하는 것으로 분류되고 인식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의 개혁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 한 때 외국의 교회들이 한국교회의 성장 비결을 배우겠다고 많이 찾아왔지만 요즈음은 매우 뜸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들 나름대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항간에는 현시대에서 시급히 개혁해야 할 대상은 정치인이나 경제인이 아니라 교회 목사라는 말들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가를 생각하면 가슴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모순적인 부조리와 난맥상이 한국교회가 아직도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신학사상이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초창기에는 주로 선교사들이 전해 준 교회와 성경 지식을 유지하다가 해방 이후 6.25사변 등을 겪으면서 잠시 혼란을 겪었지만 70년대 이후 외국에서 돌아온 학자들이 많아지면서 세계의 신학 흐름에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충분히 적응하고 정착하기에는 그 흐름의 세기가 거세고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사상에도 적지 않은 혼선과 오해가 빚어질 수밖에 없었고 소위 흑백 논리에 근거하여 너는 진보, 나는 보수하는 식의 본격적인 편가르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총장님께서 올해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새롭게 출간했습니다. 기독교강요를 출간하면서 느끼시는 교회 개혁과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에 대한 생각은 남다르리라 생각합니다.


- 기독교강요는 칼빈이 27세 때 쓴 기독교의 불멸의 역작이자 개신교 신학의 교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개혁주의하면 광범위하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을 포함시킵니다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칼빈주의에 바탕을 둔 장로교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칼빈주의적 개혁사상에 대해 분명하고도 확고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오해하는 부분도 적지 않게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긴박한 상황들이 기독교 강요를 번역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한국교회에 몇 권의 번역서들이 나와 있습니다만 대부분 일본어나 영어에서 중역된 것이어서 본래의 의미에서 많이 빗나간 부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칼빈이 직접 쓴 라틴어와 불어를  참조하여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알기 쉽게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 가지 보조 설명들을 곁들였기 때문에 칼빈의 가슴에 뛰는 개혁 신앙의 심장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정통 보수 신학의 진수를 충분히 맛볼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교단과 교회들이 분열과 대립을 반복하고, 최근에는 세계교회협의회 한국 총회 유치를 놓고 이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고조되면서 서로 대립하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 우리가 보수, 진보, 정통, 자유 신학으로 구분할 수 있는 엄밀한 기준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을 이해하는 관점에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요?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주석한 내용에는 오늘날 소위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들도 들어 있는 반면, 역으로 자유주의자들의 것에도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이 상당수 들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람하다고 생각했고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문제로 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통합측을 비롯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세계 교회 올림픽이라고 크게 환영하는가 하면, 합동측이나 고신측과 같은 보수 진영에서는 용공주의적이고 종교다원주의 색채를 지닌 자유 진보적 총회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결사적으로 막겠다면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1959년의 역사적 악몽이 되풀이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직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또다시 전 세계에 알리는 결과를 빚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교리나 신학 사상 문제로 크고 작은 갈등이 있기는 했었지만 마치 종교 전쟁을 일으키기라도 할 듯이 공포 분위기를 빚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최근 한기총이 추진하고 있듯이 보수측에서도 WEA(세계복음주의 연맹) 총회를 적극적으로 유치함으로써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것이 그동안 실추된 한국교회의 위상을 끌어 올리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교회는 물론 교단과 기관들의 정치가 사회 정치보다 더 부패했다는 지적이 과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부패될 대로 부패한 한국교회의 정치상황에 쓴소리 한마디 하신다면?


- 그동안 한국교회는 엄청난 성장과 부흥을 이룩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의 비웃음과 혹독한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중세 교회 때처럼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막대한 이권과 금권을 움켜 쥔 일부 몰지각한 교계 지도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바티칸의 교황에 못지않는 화려한 영광의 관을 쓰고 권위의 홀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한심스러운 목회자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교회 건물을 짖고 구름같이 몰려드는 교인들을 내세우면서 마치 이 시대의 구원자나 된 것처럼 행세하는 졸부형 목사들도 종종 있는가 하면 한때 일년에 몇 억원의 목회 활동비를 썼다고 해서 안티 기독교 운동자들에 의해 공개 망신을 당하고 매스컴의 빗발치는 공격을 받은 파렴치한 교역자도 있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반드시 그리고 시급히 개혁되어야 할 인물들입니다.

칼빈은 제네바시에서 성경의 원리에 기초한 신정정치를 실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잠시 거센 반발에 부딪쳐 스트라스부르그로 추방을 당하기는 했었지만 다시 돌아와 죽는 날까지 성공적으로 개혁정치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회 전반에 대해 정치적인 개혁은 이룰 수 없다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먼저 성경에 근거한 개혁운동을 전개 할 때 이 땅 위에는 정녕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교회 천국이 속히 임하게 되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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