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상] 칼빈주의, ‘살아있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상태바
[기획-상] 칼빈주의, ‘살아있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 표성중
  • 승인 2009.06.25 08: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칼빈 탄생 500주년, 한국교회의 오늘과 내일(상)
▲ 칼빈주의는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서도 지지자들을 만들어나갔다. 사진은 가톨릭교회의 상을 부수는 플랑드르의 판화(1566년)

한국교회가 칼빈탄생 500주년을 맞아 올 초부터 칼빈의 신앙유산을 교회의 상황에 맞도록 재조명함으로써 미래목회 방향성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자들의 신앙과 ‘오직 성경’과 ‘참된 교회’를 강조했던 칼빈의 건전한 신학사상이 최근 교회 내부 뿐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하향곡선을 그리며 추락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유일한 돌파구라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칼빈의 종교개혁과 ‘칼빈주의’로 알려진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한국교회에게 있어 많은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칼빈이 이룩한 업적의 특징이 한국교회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될지에 대한 논의가 우선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


칼빈의 신학과 그의 사상이 오늘날 교회에서 강조하고 있는 모든 신학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이 ‘인간의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등 5대 강령을 중심으로 성경의 원리를 체계화했다고 하지만 개혁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5대 정신(오직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주께 영광)은 이미 초대교회 사도로부터 시작되어 종교개혁자들의 중심주제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즉, 칼빈 이전에도 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와 같은 신학자들도 개혁주의의 5대 정신을 강조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칼빈이 기독교의 모든 신학적 사상을 총 망라하고 새로운 신학적 체계를 완성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지향하는 것은 좋지만 맹목적으로 칼빈신학을 따르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던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본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교회를 위한 신학’을 체계화했던 칼빈의 신학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특히 교회법을 강조하고, 올바른 말씀선포, 참된 성례의 시행, 하나님 말씀을 기초로 한 정당한 권징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칼빈의 신학적 입장을 중요하게 인식해야 한다.


‘교회개혁’에 중점 둔 칼빈, ‘제네바 법령’ 통해 4가지 직분 강조

한국교회 강단은 성경의 진리를 바로 가르치지 않는 오류 범해


칼빈의 종교개혁 중 가장 크게 주목할 점은 ‘교회개혁’에 있다. 칼빈의 제네바 개혁은 참된 교회로의 복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이를 위해 ‘제네바 법령’을 만들었다. 이 법령은 교회에서의 삶 전체를 위한 법 제정의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칼빈은 질서정연한 교회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4가지 직분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는 이 4가지 직분을 활용해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성도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말씀에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며 고통당하는 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었다.


즉, 그의 교회법에 따르면 목사는 설교ㆍ교훈ㆍ권면ㆍ성례의 집례를 위해 존재한다. 교사는 신학을 강의하며,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고 목회자 후보생들을 훈련시키는 자다. 장로들은 무질서한 자들을 사랑으로 권면하며 교회를 치리해야 한다. 집사는 교회의 재산을 보호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돌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신학자로만 알려진 칼빈도 이러한 교회법을 바탕으로 목회사역에 충실했던 목회자였다. 그린빌 신학교 총장인 조셉 파이파(Joseph A. Pipa)목사는 지난 2월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이 개최한 ‘칼빈의 신학과 목회’라는 세미나에서 “오늘날의 목회자는 질서정연한 교회와 직분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집중했던 칼빈의 목회를 배워야 한다”며 “성경적으로 기능하는 당회와 집사들이 없이는 참된 종교개혁을 할 수 없으며, 설교만으로도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치리장로들이 상담과 가정 심방에 있어서 주의 깊게 살피고 목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택받은 백성들의 모임, 성도들의 어머니와 학교, 그리스도께 속한 질서 있는 교회라는 칼빈의 교회관은 교회 내에서의 각 직분에 대한 진정한 권위를 강조했다. 이런 측면에서 목회자 중심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목회자의 권위만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칼빈의 교회법과는 사뭇 대조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목회자 중심의 교회관은 목회자의 자질문제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칼빈주의연구원장 정성구박사는 “칼빈의 교회개혁은 성경에 기초했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칼빈의 교회개혁과는 사뭇 멀어지고 있다”며 한국교회의 문제는 평신도의 문제가 아니고 목회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정성구박사는 “목회자의 문제는 동시에 강단의 문제”라며 “한국교회 강단은 성경의 진리를 바로 가르치지 않고 신학의 빈곤으로 설교자들이 자의적 설교에 매여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바로 성경의 재발견이며 강단의 회복이었던 만큼 한국교회는 강단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개혁자로서 목회자로서 많은 도전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칼빈은 오직 은혜의 진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교역자의 야심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욕구충족을 위한 야심에서 출발해서는 안되지만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꿈과 비전이란 명분으로 사역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교회 목회자는 칼빈의 설교사역을 반드시 본받아야 한다. 제네바 개혁이 성사된 근본적인 수단은 설교였기 때문이다. 칼빈의 신학과 설교는 하나님께서 은혜의 수단으로 주신 설교가 상실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유용한 모델이 될 수 있으며, 미래목회를 위한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다.


조셉 파이파목사는 “설교자가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그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거나, 청중의 구원을 잊고 미친 욕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는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다. 칼빈은 설교자를 높이고 하나님을 높여드리지 않는 강단을 반대했던 만큼 오늘날의 목회자도 하나님을 높이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인섭교수(총신대)도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교회의 영혼과 같은 것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축복의 통로였고, 교회의 자유와 개혁을 향한 칼빈의 투쟁은 설교의 자유와 개혁을 향한 투쟁이었다”고 강조했다.


성경적인 설교가 아닌 인본주의적인 설교가 강단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가슴을 품은 진리의 대언자인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칼빈의 교회법과 관련해 한국교회는 권징사역을 제대로 시행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큰 문제다. 현재 올바른 권징을 위한 신학적 체계 및 교회적 법도 제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한국교회는 권징이라는 것이 종교적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교권주의자들의 칼날이 되어 정치적인 도구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현재 엄격하고도 올바른 권징사역이 필요하다. 무분별한 목회자의 양성과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적절한 권면과 책망이 따라야 하고, 그 결과로서 성도로서의 참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의 교회법에 따르면 권징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한 성도의 삶을 권계하고, 다른 지체들의 경건을 유지하고, 죄를 부끄러워해 회개에 이르게 함이라고 되어 있다. 즉, 성경적인 삶을 전혀 살아가고 있지 못한 이들로부터 하나님의 영화로움을 지키기 위해 권징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순결을 보존하는 것과 연관될 수 있다. 또한 악한 사람들과 무분별한 교제가 지속됨으로써 성도들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한 성도들이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라도 권징사역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권징에도 반드시 규율이 있어야 한다. 칼빈은 모든 직분자들의 권한은 마땅히 제한되어야 하며, 성경에서 이탈한 권위는 부패의 온상이 되기 때문에 결코 인간적인 권위를 교회에 끌어들이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교회 안에서의 다양한 직분들은 결코 성도들 간의 우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잘못된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아무 말 없이 무조건 조용히 따라올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올바른 성경적 원리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칼빈은 교회정치에 관련된 문제에 관해 사람들이 주도권이나 지배권을 꿈꾸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법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교회에서 법을 없애버리면 곧바로 교회의 규율들이 와해돼 완전히 불구가 되고 흩어지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칼빈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또 하나는 ‘성화’다. 총신대 강웅산교수는 “한국교회는 칭의론은 잘 가르치는 데 반해 성화의 삶을 강조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즉, 한국교회는 구원에 대한 확신은 강한 반면 삶 속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모습은 나타나고 있지 않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성화보다는 칭의에 관심이 많은 한국교회의 이러한 인식에 대해 원종천교수(아신대)도 “칼빈은 이신칭의를 절대로 포기하진 않았지만 그와 동시에 선행 없는 칭의는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며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주장하고, 이신칭의의 오해와 남용은 선행의 나태와 성화의 부진, 윤리적 병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원교수는 “기복신앙으로 물든 한국교회는 거룩한 삶과 윤리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적 외형이 하나님의 축복인양 착각하며 이기적으로 복만을 추구하고, 이신칭의를 빌미로 자신의 신앙을 정당화하며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칼빈의 가르침을 상기해 볼 때 한국교회의 심각한 상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성화의 삶이 한국교회에 필요함을 피력했다.


이 외에도 칼빈이 남긴 신앙유산들은 한국교회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칼빈신학과 칼빈주의란 말이 더 이상 하나의 교권적 슬로건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신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진리를 보수하기 위해 거짓 신학과 싸우며 투쟁하는 것이 칼빈주의가 지향하는 신학이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개혁자의 길을 걸어갔던 칼빈을 기억해야 한다.



■칼빈(Calvin, John)은 누구인가?(1509~1564)

* 초기 생애와 교육(1509-1533)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피카르디(Picardy)의 작은 마을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다. 칼빈이라는 이름은 ‘코뱅’이라는 그의 성이 라틴어로 칼비누스(Calvinus)라고 번역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통 제조업자였던 아버지 때문에 칼빈은 그 지방 출신의 상류계급의 자녀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지며 14세가 될 때까지 나아용에 있는 카페트(Cappett) 사립학교에 다녔다. 칼빈은 타고난 지성과 판단력으로 학우들 사이에서 뛰어난 인물로 인정받았다. 반면  평소에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몸이 허약하고 신경질적이었고,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화를 잘 내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파리의 라 마르슈(de la Marche) 문과대학에서 저명한 라틴어 학자였던 마튀랭 코르디에(Marturin Cordier) 문하에서 1년 정도 수학했다. 하지만 칼빈은 금욕적이고 엄격한 훈련으로 유명한 몬테뉴(de Montaigu)대학으로 옮긴 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오를레랑(Orleans) 대학, 부르주(Bourges) 대학, 왕립 프랑스(College of Royal Lectures) 대학 등에서 법률ㆍ헬라어ㆍ히브리어ㆍ문학 등을 배웠다.


* 칼빈의 회심(1529-1536)

1531년 부르주에서 법학공부를 하면서 설교를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진 칼빈이 정확히 언제 회심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칼빈은 1533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으며, 종교개혁 운동에 합세했다. 이후 1534년 5월 4일 공식적으로 로마교회와 결별하고 제세례파의 영혼 수면설 교리를 논박하는 ‘영혼수면설 논박’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져 칼빈은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바젤(Basel)에 머물게 됐다. 이 곳에서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초판을 완성했다. 당시 26세였다. 1536년 3월 바젤에서 라틴어로 출판된 ‘기독교강요’는 모두 6장으로 구성됐다(1장:율법, 2장:신조문제, 3장:기도(주기도), 4장:성례, 5장:다른 성례들, 6장:기독교인의 자유).


* 1차 제네바 사역(1536-1538)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 독일의 찰스 5세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칼빈은 1536년 제네바를 경유해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이 칼빈을 찾아와 제네바교회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설득해 그해 8월부터 제네바에서 성경교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시의회를 통해 고용된 칼빈은 성경의 원리들을 제네바 시민들의 생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민들의 생활에서 개인적인 거룩함을 촉구했고, 교회가 스스로를 관리하고 다스릴 수 있는 자율권과 출교를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했다. 1537년 초에는 시의회에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을 작성해 제출하고, ‘신앙고백서’도 만들었다. 하지만 칼빈의 개혁운동은 반대에 부딪쳤고, 1538년 4월 23일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에서 추방됐다.


* 스트라스부르그 사역(1538-1541)

추방당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갔다. 당시 스트라스부르그는 많은 프랑스 종교 망명자들의 피난처였다. 칼빈은 개혁가였던 마틴 부쳐(Martin Bucer)의 추천으로 프랑스 난민 교회에서 사역했다. 이곳에서 그는 교회정치와 예배에 대한 그의 원칙을 자유롭게 시행하면서 그의 교리와 실천을 보다 분명하게 발전시켰다. 1539년 2월에는 신학교수로 임명되어 고린도서를 강의했다. 또한 그해 8월에 ‘기독교강요’ 제2판을 출판하기도 했으며, 로마서 주석을 간행했다. 1541년 1월에는 ‘기독교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했으며, 사회적 혼란이 가중된 제네바 시의 요청에 따라 1541년 9월 3일 제네바로 돌아갔다.


* 2차 제네바 사역(1541-1555)

1541년 칼빈은 ‘교회법’을 제정하고 장로교회의 교회정치 원리를 발전시켰다. ‘교회법’을 통해 칼빈은 교회권징에 이어서 교회의 자율권을 확립했으며,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으로 교회조직을 구성했다. 교리 문답서를 작성해 교인들을 교리적으로 훈련시켰다. 하지만 칼빈은 1553년에 있었던 세르베투스(Servetus)의 재판과 처형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스페인 출신인 세르베르투스는 당시 삼위일체를 부정한 이단자였다. 그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동정녀 탄생, 유아세레, 그리스도의 신성 등을 부인했다. 결국 시의회는 그에게 이단에 대한 유죄를 인정, 산채로 화형에 처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1553년 10월 27일 화형에 처해지면서 칼빈에게 승리를 가져다줬지만 역사와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세르베르투스의 화형에 대한 비난도 함께 받고 있다.


* 말년의 사역(1555-1564)

세르베르투스의 처형은 칼빈에게 이어서 정세의 변화를 위한 촉매제였다. 1559년 제네바 시민이 되는 영예를 얻은 칼빈은 교회사역의 질서와 규율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1559년 6월 5일 목회자를 양성할 수 있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개교했다. 이후 칼빈은 5명의 교수들과 함께 신학을 가르쳤다. 또한 1년에 약 200회의 강의와 설교를 진행했으며, 성격 각 권의 주석을 썼다. 그리고 ‘기독교강요’를 계속 재편집했다.

하지만 치질, 궤양, 관절염, 천식, 결핵 등의 많은 질병은 1564년까지 그를 따라다녔으며, 2월2일 마지막 강의,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끝으로 4월2일 마지막예배, 1564년 5월 27일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