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세례전적 영성 탐구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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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세례전적 영성 탐구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 추구
  • 이현주
  • 승인 2009.03.0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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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렐루야 숨기기’ - 사순절(四旬節, Lent)에 즈음하여

 류호준교수<백석대학교 구약학>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죽이고 ‘새롭게 되는 일’에 집중하는 기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묵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심장이며 핵심이다. 성금요일과 부활절은 기독교인의 신앙달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축제의 날들이다. 사순절은 준비와 참회의 기간으로 이 기간에 우리는 성금요일과 부활절을 갈망하며 기다린다.

사순절(四旬節)은 문자 그대로 ‘사십일 기간’이라는 뜻이다. 사십일을 따로 떼어 놓아 특별한 절기로 지키게 된 것은 대략 주후 3-4세기경으로 올라간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숫자로, 사순절의 40이라는 숫자는 특별히 구약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것과, 새로운 이스라엘인으로 오신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 유대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준비하신 일에 기반을 두고 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애굽 왕 바로의 폭정에서 시달리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웨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위대한 능력으로 구원을 받아 출애굽하였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 광야에서 신앙의 훈련을 받게 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창조의 주님), 억압과 폭력과 고역의 쇠사슬에서 구원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구원의 주님)께만 영광과 찬양과 충성과 신뢰를 바치며 살아가는 과정이 광야의 삶이었다. 그들은 광야의 학교 40년 동안 단 한 가지 과목을 이수하도록 등록한 신앙의 학생들이었다. 과목 명칭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광야로 대표되는 죽음의 영토에서 그들은 생명의 공급과 유지 장치가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배워야 했다.

광야 시절은 풀 한 포기 생존하기 힘든 극한 환경에서 2백만 명이 넘는 출애굽의 생명들이 살아남는 길이 무엇인지 온 몸으로 배워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훗날 광야 생활이 마칠 즈음에 광야 학교의 유일한 과목명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

광야 생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사는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었다”(시 8:3). 우리가 이제는 다 알게 되었지만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광야의 학교의 유일한 과목에서 다 낙제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치룬 것은 바로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실패한 시험을 그대로 다시 치르신 것이다. 40일을 굶주리신 예수께 사탄은 광야의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하였다. 예수의 대답은 바로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 그대로였다.

예수님의 광야 40일 체험은 옛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체험의 축소형 재생이었으며, 여기서 예수는 ‘새로운 이스라엘’(New Israel), ‘참 이스라엘 인’(True Israelite)으로 나타나게 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들이기를 추구하는 크리스천들은 그분과 함께 이 사순절에 광야 체험을 연습해야 할 것이다. 체험 연습의 중심부에는 항상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는 일이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연고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삶을 참된 삶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드려지는 절기가 사순절이다.

사십일의 기간은 성회(聖灰) 수요일(2009년은 2월 25일)로부터 시작하여 수난주간(2009년은 4월 6-11일)까지 계속되는데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일요일(주일)들은 숫자에 포함하지 않는다. 일요일은 기쁨과 즐거움의 예배를 위해 따로 떼어놓은 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은 사순절 기간의 주일에는 ‘참회’(repentance)와 ‘갱신’(renewal)에 초점을 맞추어 예배를 드린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罪性)을 죽이고, 새롭게 되는 일에 집중하는 기간이 사순절이다. 전자가 고통을 수반하는 회개(mortification)를 가리킨다면 후자는 성령을 통한 새 생명(新生)의 기쁨을 회복(vivification)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길로 안내하는 성경본문으로서는 시편 50장; 이사야 1장; 요엘 2:12-17; 마태 6:1-6, 16-21이 있다. 또한 기독교 전통에 일곱 편의 참회시라는 것도 있다(시편 6, 32, 38, 51, 102, 130, 143).

기독교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사순절은 부활절 주일에 세례를 받을 사람을 위해 신앙을 교육시키고 그들이 그 날에 온 회중 앞에서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도록 준비시키는 기간이었다. 교회에서 멀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각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 경건생활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며(예, 기도생활, 성경읽기, 구제하는 일), 구세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마음속 깊이 새기도록 준비시키는 절기였다.

이처럼 사순절의 일차적 초점은 ‘세례전적 영성’(baptismal spirituality)을 탐구하고 함양하여 그 영성을 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는 일에만 무게를 두는 것은 아니다. 이 영성의 중심부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 있다. 세례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의 옛 자아는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전적인 영성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아마 이에 대한 고전적인 구절로서 복음성가로도 잘 알려진 말씀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개인적으로 사순절을 지키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순절에 무엇인가를 ‘포기’한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일에 힘을 쏟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특정한 성경이나 본문에 초점을 맞추어 공부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로 걸어가는 여정에 도움이 될 만한 경건 서적을 읽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순절에 어떤 종류의 설교를 기대하는 것이 좋을까? 아마 크리스천의 생활과 삶의 방식 혹은 기독교인들의 덕목과 핵심가치들에 대해 배우는 기간이면 좋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주제를 깊이 탐구하고 묵상하며 삶 속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회개’, ‘겸손’, ‘금식’, ‘기도’, ‘경건’, ‘자기훈련’, ‘신실함.’ 아니면 갈라디아서 5장에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말씀하신 성령의 열매들도 적절한 주제들이다(‘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자비’, ‘착함’, ‘성실’, ‘온유’, ‘절제’). 겹치기는 하겠지만 청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크리스천의 삶을 위한 핵심적 가치들을 묵상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순절의 전통적인 색상은 ‘자주색’(purple)이다. 어떤 교회는 사순절과 부활절 기간(부활절 기간이란 부활주일부터 승천일까지, 혹은 오순절이나 성삼위일체주일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을 대조시킨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경우 사순절 기간에는 보통 ‘알렐루아’(Alleluia)를 노래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는 이야기 하나를 들어보자. 일명 ‘알렐루야 숨기기’(Hiding the Alleluia)다.

‘알렐루야 숨기기’라면 매우 이상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순절을 의미 있게 지키기 위해 미국의 한 개혁교회의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이 내신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먼저 카드 위에 ‘알렐루야’라는 글자를 크게 써넣는다. 그리고 그 카드를 사순절 기간 동안 아무도 보지 못하게 싸서 감추어 놓는다. 부활절 주일이 오기까지 아무도 입밖에 ‘알렐루야’라는 단어를 내뱉거나 말하거나 노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찬송가 중 ‘슬픔의 사람’(Man of Sorrows)이라는 찬송을 사순절 기간 동안 반복해서 부르게 한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둘러보면서 ‘슬픔의 사람’을 노래한다. 그러다가 그 찬송 가사 가운데 ‘알렐루야’가 나오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음-음-음~~~’하다가 그 다음 가사인 ‘놀라운 구세주!’(what a Savior!)라고 부르게 된다.

사순절 기간 동안 주일학교 어린이 예배시간에 아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즉,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에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旅程)에 어린아이들도 동행하는 것이다. 사순절에 강단 앞에 커다란 십자가를 세워 놓는다. 거친 막대기로 만든 십자가다.

그리고 허수아비에 헐거운 옷을 입히듯이 그렇게 십자가의 펼쳐진 양 팔에 헐거운 천을 걸쳐놓는다. 사순절의 첫 주일에 주일 학교 선생님은 알렐루야를 적은 카드를 강단 앞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 위에 걸쳐진 넓은 천 속에 숨긴다. 이렇게 해서 아무도 사순절 기간에 그 ‘알렐루야’를 보지도 말하지도 노래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예수께서 부활절 아침에 우리가 ‘알렐루야’라고 노래하고 찬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분이 십자가에서 값을 치룬 사실을 회상하고 기억하는 길이다.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날들에 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어린아이들에게 ‘알렐루야’가 눈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알렐루야는 완전히 없어지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잠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인 것뿐이었지 실제로는 그들 가까이, 그들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었다. 아마 우리들 대부분이 야웨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이 어떨 것인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둡고 캄캄함이 엄습하여 오는 삶, 한 치 앞길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어둔 계절 동안, 북풍과 한설이 몰아치는 혹한 속에서, 그래서 ‘알렐루야’라고 소리도 낼 수 없고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때에라도, 알렐루야가 우리의 눈앞에서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을 때에라도, 그 ‘알렐루야’는 결코 우리로부터 멀리 있지는 않다. 손자를 잃은 고통, 신장결석으로 인한 통증, 그렇게도 믿었던 사람에 의한 배반의 고통 - 이런 것들이 우리의 입에서 찬양(알렐루야)들을 소리 내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두운 힌트’일 뿐이다. 왜냐하면 ‘알렐루야’의 끝마디인 ‘야’(Yah = 야웨)는 항상 우리와 함께, 때론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때에라도, 우리와 함께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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