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전의 함성…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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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전의 함성…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 현승미
  • 승인 2009.02.2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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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순교수<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장>


90년 전 온 나라에 울려 퍼졌던 함성,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3·1절 아침 태극기를 내걸고 있는 내 귓가에는 그날의 함성이 들려오는듯하다. 우리는 이날의 함성을 3·1운동,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여 나라와 자유를 되찾고자 했던 평화적 시위다.

당시 일본은 1905년 11월 18일 소위 을사조약이라 불리는 불평등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 일당과 일본 제3대 통감인 데라우찌‘寺內正毅’는 소위 말하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고는 총감부 대신 총독부를 두어 본격적으로 무단식민통치시대(武斷植民統治時代)가 시작되었다.

일제는 합방을 전후해 농업ㆍ상업ㆍ어업ㆍ광업ㆍ임업 등 각 분야의 산업을 식민경제체제로 바꾸어 착취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수많은 농토와 임야를 빼앗아 일인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우리는 고유문화를 말살 당하였고, 대다수의 우리 농민들은 소작농·화전민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심지어 살기가 어려워 나라를 떠나 만주 등지로 유랑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항거하였고, 민족계몽운동을 펼쳤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항일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일제는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하였고, 일체의 결사(結社)와 언론활동을 금지하였으며,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하여 우민정책을 펴기까지 하였다.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가 일본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유포되면서, 지식인·학생·종교인뿐만 아니라, 농민·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의 농축된 반일감정이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활화산같이 폭발하였다.

이렇게 발생한 3·1운동의 특성은 첫째, 우리 민족의 자발적 의지와 역량에 의해 발생하였다. 우리는 흔히 3·1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이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고 하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힘입어 발생한 것으로 말하기도 하나,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를 활용하기는 했어도, 그 주의에 의해 발생된 운동으로 보기보다는 농축된 우리의 역량과 감정이 분출 된 것이다.

둘째로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고수하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으며,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고 하나 일제의 피해는 아주 미미하였다. 이는 유관순열사가 이끌었던 아우내만세운동 현장에서 19명이 죽었으며, 30여명이 부상당하였으나 일제의 피해는 없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셋째, 중국의 5·4운동이나 인도의 독립운동은 물론 전 세계 약소국에 큰 희망을 준 성공한 운동이었다.

3·1운동의 인물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3·1운동의 꽃’이라 불리는 유관순(柳寬順) 열사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중권씨의 삼남 이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은 기독교 영향을 받은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숙부가 선교사로 일하는 매봉교회와 샤프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매봉교회는 1901년경에 설립되었고,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는 등 애국운동을 펼치다 일병(日兵)의 방화(放火)에 의해 소실되었으나, 유관순의 친척인 유빈기(柳斌基)가 케이블(E, M, Cable)선교사와 함께 돌아와 조병옥의 부친인 조인원(趙仁元), 유관순의 숙부인 유중무 등과 1908년에 재건한 교회다.

당시 기독교는 손인수의 ‘日帝下의 敎育理念과 그 運動’에 의하면, 단순히 내세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선교사들의 가르침 속에는 기독교를 믿어 민족적 구원을 성취하기 바라는 내용이 강하게 나타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받아들이는 한국인 기독교도들의 의식 속에서도 개인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염려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이만열은 그의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1900년이 되면서 일제는 한국 기독교인을 배일적(排日的)이라고 분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급증함을 ‘일본의 압박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가 와서 십자가 보호 밑에 크게 세력을 양성하여 장차 십자군병을 일으켜 일본의 세력을 한국에서 축출하자는데 있다’고 보게 되었다.

유관순의 뇌리에는 이러한 기독교 사상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애국운동과 독립군 활약상을 자주보고 들으며 자랐다. 더구나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굽히지 않고 관철하고야 마는 성품을 지닌 유관순은 이러한 성장과정을 통해 배일사상을 싹틔웠으며, 기울어가는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헌신해야겠다는 굳은 의지와 신념을 키웠다.

이화학당을 다니던 유관순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뒤, 일제의 강압적인 휴교령에 따라 고향에 내려와 교회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동안 서울에서 있었던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하며, 숨겨왔던 독립선언서를 내어놓았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거사 일을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음력 3월 1일)로 잡은 유관순은 사촌언니 예도(禮道)와 함께 일경의 눈을 피해 지역의 유지들은 물론 교회와 이웃 지역까지 찾아다니며 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설득하였고, 이를 위해 밤새도록 태극기를 만들었다. 태극기를 그린다는 것은 매우 비밀스러운 작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유관순과 유예도 뿐이었으므로 두 사람이 전담하여 밤을 새워 가며 그렸다.

4월 1일 아우내 장날 아침, 거사를 미리 알고 찾아온 군중과 장사꾼으로 아우내 장터는 민족혼이 충만했다. 유관순은 군중들의 행렬을 정돈하며, 길목에서 광주리에 숨겨온 태극기를 일일이 나누어주고, 행렬의 선봉에 서서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행렬을 이끌며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행렬이 장터 복판에 이르자 쌀 섬 위로 올라가 독립의 중요성과 반드시 독립을 쟁취해야 함을 연설하며, 군중을 독려하였다.

거사 현장에서 유관순의 부모님을 포함하여 19명이 일병의 총칼에 무참하게도 순국하였으며, 30여명이 다쳤고,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유관순은 그 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으로부터 5년형을 받았고, 다시 경성 복심법원으로 넘겨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다.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일부 무혐의 처리와 함께 형을 감량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안중근 의사가 일제치하에 있었던 중국의 여순감옥에서 상고를 포기하고 1심만으로 사형을 맞은 것과 같이 日人의 재판을 거부하여 고등법원에 상소함을 포기하였다.

유관순은 일본인들이 판치는 이러한 세상에서는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옥중에서도 조석으로 만세를 외치며, 동지들을 격려하고 고무하였다. 유관순은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더욱이 1920년 3월 1일이 되자, 3.1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옥중에서도 만세를 주동하여 일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결국은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렇게도 목메어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꽃다운 나이 19세에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3·1절 아침, 90년 전 온 나라에 울려 퍼졌던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그 함성은 나에게 ‘당시 교육자들과 같이 학생들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주고 있는가? 당시 교회와 같이 나라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가? 당시 기독교인과 같이 희생적인가?’ 라고 묻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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