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볼만한 곳] 아흔번째 3.1절에 만난 믿음의 독립투사들과 그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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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볼만한 곳] 아흔번째 3.1절에 만난 믿음의 독립투사들과 그 현장
  • 현승미
  • 승인 2009.02.25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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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90번째 삼일절을 맞았다. 3·1절은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그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됐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이들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우리나라의 이 역사적 사건에 그 누구보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앞장서 이로 인해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야만 했던 뼈아픈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려운 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그 역사적 장소들을 찾아가 그들의 굳은 신앙아래 뿌리내린 민족애를 배워보자.


# 기미독립선언서를 외친 ‘탑골공원’

서울의 대표적인 거리 종로 한복판에 자리한 탑골공원. 1919년 3월 1일 종로 탑골공원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을 대표해 정재용전도사가 큰 소리로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선언문 낭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경이 들이닥쳐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해 날뛰는 와중에서 ‘조선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 독립운동의 물꼬가 터진 역사적인 현장이 탑골공원인 것이다. 또한 3·1운동의 주역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 인사들이었다.


# 정동 이화여고 ‘유관순 기념관’

유관순열사를 기리기 위해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1974년 건립했다. 1층에는 2천여 석의 좌석을 갖춘 강당이 있고, 2층에는 유관순의 사진과 유품들을 보존·전시하고 있다. 2005년 3월 1일 제86주년 3·1절 기념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유관순은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에 편입했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학교의 경비로 공부하는 학생)으로 입학했다. 교정에는 동상과 함께 ‘유관순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가 남아 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공원

주변 시민들의 자연휴식공간으로 자리잡은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는 우리의 뼈아픈 식민지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있다.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와 선열들의 자주독립정신을 배울 수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1995년 공사를 시작해 1998년 11월 개관했다.

3·1운동 직후 유관순열사가 투옥돼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사형장, 옥사 7개동, 역사전시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관사와 고문실로 쓰이던 역사전시관에는 영상자료실, 강우규의사의 의거를 재현한 매직비전, 형무소역사실,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벽관·독방 등의 옥중생활실 등이 있다. 이밖에 사형장 옆에 시신을 몰래 버리기 위해 만든 시구문도 복원돼 있다.


# 화성 ‘제암교회’와 ‘수촌교회’

1919년 3.1독립 만세 사건이 있은 후 다른 지역 주모자는 다 체포됐으나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이 체포되지 않자 당시 일본육군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제암리 토벌에 나섰다. 같은 해 4월 14일, 15세 이상의 제암리 마을 남자들을 모두 제암리교회로 모이게 한 후 교회의 문과 창문을 모두 잠근 후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르고 집중사격을 가했다. 당시 교회에 모였던 23인이 희생됐으며 제암리 마을의 33가구도 2채만 남긴 채 모두 불태워졌다.

이 사건이 이튿날 신속하게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수소문을 접한 언더우드, 커티스, 테일러선교사 일행이 자동차로 수촌리 현장을 확인,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으며, 스코필드선교사가 4월 18일 단독으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해 참상을 몰래 촬영했다. 1905년 사랑방 예배로 시작된 수촌교회는 일제의 만행으로 불타고 사진은 1938년에 다시 지은 예배당이다.


# 천안 ‘매봉교회’와 ‘유관순열사 생가’

매봉교회는 유관순열사가 어렸을 때부터 다녔던 교회로, 유관순열사 생가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다.

감리교에서 스웨러선교사에게 공주 천안지역을 순회 전도하게 했다. 이때 스웨러 선교사가 목천, 병천을 순회 전도하다가 1899년에 지령리에 도착,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인 1901년 박해숙 전도사에 의해 복음이 전파돼 교회가 세워졌다.

매봉교회는 두 번씩이나 일본인들에 의해 교회가 불타버렸고, 해방 될 때까지 철저하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핍박을 받았던 교회이다. 해방 후 유관순열사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창립 80주년을 기념해 재건립했다. 지금의 건물은 1998년 기독교대한감리교회 남부연회의 후원으로 새롭게 지은 것이다.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이며 지하 1층에 유관순열사의 전시관, 1층에 교육관과 사택, 2층에 예배공간이 있다.


# 자발적 모금으로 세운 ‘독립기념관’

1987년 8월 15일 충청도 일원의 독립운동의 얼이 가득한 천안시 목천에 역사적인 민족의 숙원이었던 독립기념관이 개관됐다. 1982년 일본의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대한민국은 전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전국적으로 반일감정이 높아가던 중 정부와 민간이 일심동체가 돼 어린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뜻을 같이하여 자발적인 모금으로 이룩된 독립기념관이 탄생하게 됐다. 이곳엔 모두 7개의 주제별 전시관이 있지만 일제침략관과 3·1운동관, 독립전쟁관은 특히 신앙과 애국의 뜻을 되새길 수 있는 곳이다.


# 아우내 3·1운동 독립사적지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아우내 장터로 유관순 열사가 시위를 하며 만세를 부른 곳이다.

유관순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여했으며 학교가 휴교하자 병천으로 가서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1920년에 옥사했다.

독립운동지역은 3·1운동 때 만세를 불렀던 곳으로,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1947년 병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구미산에 기미독립만세 기념비를 세우고 그 행적을 비문에 새겼다. 또한 유관순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그 영혼을 추모하려고 매봉산 아래에 추모각을 지었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보수, 정비했으며, 1986년에 경역(境域)을 넓혔다. 추모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목조 기와집이며 동양화가 장우성이 그린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 밖에 유관순 동상과 초혼묘 등이 있다.


#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유관순연구소는 순국열사 유관순의 애국애족 활동을 연구해 그 업적을 기리고 3.1운동 정신을 되살리고자 백석대학교 부설 연구소로 ‘유관순연구소’가 창립됐다. 매년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유관순 열사 탄신 100주년이었던 2002년에는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갖기도 했다.

이 때 그동안 잘못 알려져 왔던 유관순열사의 출생년월일, 순국일 및 형량 등을 새롭게 밝혀 이를 바로 잡기도 했다. 또한 2003년부터 매년 여름 유관순학교를 개설해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유관순 열사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계승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관순열사가 오촌 조카 유제경의 탄생을 축하하며 만든 유일한 유물 ‘삼색 뜨개 모자’, 유열사가 수감됐던 ‘서대문 형무소의 벽돌’,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1962년에 수여받은 ‘건국훈장 독립장’, 아우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자 외쳤단 ‘강대상’ 등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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