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르포]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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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르포]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 정재용
  • 승인 2008.12.18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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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동 농산물 시장의 겨울 풍경

달빛도 흐려져 먼동이 트기만을 기다리는 짙은 어둠의 새벽녘. 도심 한복판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의 새벽은 덜그럭 덜그럭 빈손수레들만이 오갈 뿐 밤새 추위에 얼어붙어 저마다 입을 떼지 못해 적막을 더한다. 팔도 산지에서 대형 트럭에 실려와 경매를 마친 수확물들은 새 주인의 손에 건네졌고, 혹여나 아직도 주인에게 전해져야 할 것들이 더 남았는지 손수레들이 시장통을 헤매고 다닌다.

찬바람에 귀가 얼어붙고 흘러내리는 콧물이 입 주변에서 반짝이고 있을지라도 새벽시장 손수레를 끄는 사람들도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것이 있다. 바로 성탄절이다. 묻지 않아도 오랜 세월 시장골목을 누벼왔을 노인부터 수백 포기의 배추와 무를 실어 나르는 청년까지 저마다 자신의 손수레에 트리 장식을 달아놓기도 하며 자신도 모를 어떤 기다림을 얘기하고 있었다.

시장 한 켠 삼삼오오 모인 손수레들 뒤로 몇 명의 노인이 모닥불에 몸을 녹이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저 사람들 모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을까. 슬그머니 옆에 앉아 성탄절에 대해서 물어보니 다들 한마디씩 하느라 얼었던 입이 녹는다.

“그날 손자들이 잔뜩 오는데 어디를 가? 1년 내내 며칠이나 본다고, 그날 실컷 봐야지. 살아봐야 얼마나 산다고….”

“그래도 교회를 가야지 죽으면 천국 갈 수 있어.”


“너나 교회 나가면서 그런 소리해.”

“허허허”

올 한해 유난히도 힘들었을 사람들이다. 모닥불에 잠시 몸을 녹여보지만 얼어붙은 마음은 쉽게 녹질 않는다.


예년 같았으면 하루 십 수 만원은 벌었을 것을 이제 나이도 들고 일도 많지 않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푸념한다. “내가 이걸 죽을 때까지 끌어야 되나 했는데 얼마나 더 할지 모르겠어. 옛날 같지가 않아 요즘은….” 옛날 같았으면 한창 바쁘게 돌아가야 할 김장철인데 찾는 사람이 줄어 시장 문을 일찍 닫으니 마음이 착잡한 것 같다.

커피와 온갖 차가 가득한 조그만 손수레를 끌고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커피 한 잔씩 하세요.”


꼬깃꼬깃 천원짜리 한 장씩 꺼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한잔씩 손에 들고는 아주머니에게 ‘메리크리스마스’라고 너스레를 떠는 할아버지들.
 

그 가운데 손수레를 끈지 그리 오래 돼 보이지 않는 한 할아버지가 시장에 와보니 경제가 어려운 걸 뼈저리게 실감한다며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서 제일 막낸데… 하하…  요즘 보통 어려운 때가 아닌 것 같아요. 나도 얼마 전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아줄만한 기업의 사장이었는데 하청업체들이 줄줄이 부도나는 걸 지켜보다가 내 회사 식구들 2천명 월급도 다 못주고 나도 회사 문 닫았어요. 아들이 마련해준 작은 집에서 입에 풀칠은 하고 있지만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발 뻗고 잘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는 평생을 일궈온 회사 문을 닫게 돼 마음도 아팠지만 가족처럼 지내던 직원들이 밀린 월급 조금이라도 주실 수 없냐고 눈시울을 붉히던 모습들이 눈에 아른거린다고 했다.
“자식 덕에 발 뻗고 잘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람들도 내 식군데 한 푼이라도 벌어서 못준 월급 조금이라도 줘야 내가 편하게 눈을 감지….”


이내 모닥불을 빌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다.

찾는 발길들이 줄어들자 시장구석에 줄지어 자리를 잡은 조그마한 야채가게들도 서둘러 문을 닫는다. 얼핏 봐도 칠순은 한참 넘겼을 할머니는 아쉬움이 남았는지 전구 불만 꺼놓고 야채들 사이에 이불을 덥고 앉아서 손님을 기다린다.

할머니도 성탄절을 기다리고 계실까. “내가 내일 모레면 여든이야. 나도 성탄절에 컴퓨터회사 다니는 손자랑 같이 교회에 가.”  컴퓨터와 관련된 좋은 회사를 다니는 손자 자랑이 하고 싶은데 회사 이름이 기억나지를 않아 한참을 답답해 하다가 그만둔다.

다들 문 닫고 들어가는 시간, 지나가는 한 사람 한 사람 혹시라도 손님이 되어주지 않을까 눈을 돌려보지만 가게에 들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에휴. 배추밭들은 다 갈아엎어졌는데 사는 사람들은 없고 살 때마다 비싸다고 한마디씩들 하니… 대통령이 바뀌었으니까 살만해지겠지….” 허리춤에 두른 주머니 가득 손자에게 줄 용돈이나 벌었으면 하는 것이 조그만 소망인데 그마저도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운전석에 반짝반짝 트리조명을 두른 트럭 한 대가 시동을 걸고 새벽시장의 적막을 깬다. 젊은 기사는 “겨울날씨가 이러면 안 되죠. 더 추워야 해요. 하하하. 잠간 눈 부쳤으니까 이제 내려가야죠. 우리나라 경제도 곧 좋아질거에요. 여기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나라 절대로 안 망해요”라며 희망을 남긴다.

올 한해 너무나 힘들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기쁜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하는 사람들. 그들을 향해 성경은 말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언제가 그들이 소망하는 새날이 될지는 몰라도 시장 위로 해가 솟으려고 희미한 기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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