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태풍으로 고통받는 미얀마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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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태풍으로 고통받는 미얀마 (下)
  • 정재용
  • 승인 2008.06.2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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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일꾼들이 전하는 미얀마 사랑

태풍 나르기스로 한국교회에 문을 활짝 열게 된 미얀마. 135개 종족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에는 이들을 하나로 만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또 지금보다 조금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도움의 손길도 절실하다. 그들의 소원이 너무 거창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로 소박하기 그지없다.

135개 종족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그들의 아픔과 설움을 달래 줄 지도자만 있으면 된다. 지금 그들에게는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종족은 아무도 없다. 권력 다툼으로 인해 병들어있는 나라에서 고통 받고 있는 그들에겐 그런 욕심은 허상일 뿐이다. 질병과 배고픔에 지칠 대로 지쳐서 단지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와 1년에 5천원만 있으면 갈 수 있는 학교를 보내주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

정부가 조금만 마음을 바꾸면, 통치자 탄센이 권력을 내려놓기만 하면 그들을 돕고 함께 행복해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미얀마에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들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는 선교사들. 특히 57명의 한국인 선교사들은 하루 속히 더 큰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얀마에 들어가기 전 태국 방콕 공항에서 국제NGO GAIN(Global Aid Network)의 호주지부(대표:다니엘 윈) 사람들을 만났다.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기다리는 동안 미얀마 현지의 상황을 전해받기 위해서다. 호주지부가 GAIN의 미얀마 구호활동을 이끌게 된 이유는 조금 특별했다.

GAIN 호주지부 대표와 호주 CCC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다니엘 윈씨는 원래 미얀마에서 태어나고 살던 이민자다. 

# 마음 여는 길이 우선

▲ GAIN호주 대표 : 다니엘 윈
지금은 호주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부모님의 나라가 고통을 겪고 있어 한걸음에 달려온 그에게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다.

“아이들 70명의 다리를 묶어 진흙으로 덮어주는 모습을 봤어요. 2004년 쓰나미 때도 구호활동을 했었지만 이렇게 가슴 아픈 장면은 처음이에요.” 마른 땅을 찾기도 힘들뿐 아니라 아이들의 주검이 한두 구가 아니어서 그저 흩어지지만 않기를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이어 윈 대표는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 승려들과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했다. “승려들은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있기 그들을 도와주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어떤 때는 정부의 장관들보다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거절하는 미얀마 정부 때문에 마을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는 승려들과의 관계사역으로 전환을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희망도 전했다. “한 마을에서는 집이 모두 떠내려갔는데 목사님 집만 남아 180명의 마을 주민들을 살리는 기적도 있었어요. 쌍둥이를 안고 있는 한 엄마가 ‘아이를 한명만 데려가 키워달라’고 사정할 정도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그래도 교회로 모일 수 있게 된 것이 참 감사했습니다.”

미얀마 CCC와 미얀마 교회연합과 함께 6개 마을의 재건을 돕고 있다는 윈 대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돕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심을 기도하고 있다”며 조국의 아픔을 나누고 있었다. 

# 하나님의 크신 계획

흔히들 미얀마를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군사정권의 텃새가 심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라에서 선교사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현지 장관들과 관계를 할 수 있는 한국인 선교사도 예비해두셨다.

▲ GMI 인관일선교사
미얀마로 한국교회가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13년 전. 하지만 인관일선교사는 25년 전 사업가로 미얀마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당시 경영하던 회사를 통해 미얀마에 철과 섬유 등 연간 700만불 정도를 수출할 정도로 사업이 잘 됐었어요. 우리정부로부터 산업훈장도 받기도 했으니 미얀마에서는 성공한 사업가였죠.”

그렇게 시작된 인선교사의 미얀마 사랑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갈급함으로 이어져 평신도 선교사로 사역을 하게 됐고, 현재는 2001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GMI 선교단에서 파송 받아 헌신하고 있다.

하루라도 전기가 끊어지지 않으면 이상했던 나라. 그렇게 25년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기에 하나님께서 인선교사에게 남다른 애정을 허락하셨고, 사업으로 쌓아왔던 정부와의 관계도 훌륭한 선교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이 나라 장관들은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제가 선교를 하고 있는 것도요. 하나님께서는 저를 통해 86개의 교회를 세우셨고, 2개 신학교에서 현지인 사역자들을 양육하도록 하셨어요.”

사업가로 들어간 땅에서 하늘나라 일꾼으로 쓰임 받은 기쁨을 전한 인관일선교사는 “이미 여섯 번의 졸업생을 배출한 신학교는 현재도 120명의 현지인 사역자들을 양육하고 있다”며 “하나님께서 미얀마를 위한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한다”고 전했다.

미얀마를 사랑하기에 걱정도 있었다. “미얀마는 샹 지역을 중심으로 세계 마약의 69%를 생산하는 나라에요. 이정도면 굉장한 생산량입니다. 우민정책으로 권력을 오래 잡으려는 정부이기에 마약을 쉽게 포기 못하죠.” 마약이 나라 밖으로만 나간다면 걱정할리 없겠지만 미얀마 곳곳에서는 마약을 구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기에 인선교사에게는 걱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 복음의 결실로

기관지 확장증 치료를 위해 잠시 미얀마를 떠나있다 태풍피해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온 인선교사에게 하나님께서는 의료선교사들을 변장시켜 위험지역에까지 들어갈 수 있는 기지를 발휘하게 하셨다.

“입국을 거부하는 미얀마정부로부터 입국 허가받는 일은 수없이 도와줄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태풍피해 당시에는 출입제한 지역이 많았어요. 동역하는 K선교사의 지혜로 긴급한 도움이 필요한 지역으로 들어가 생명을 구할 수 있어 감사했어요.”

현재도 피해실상을 드러내길 거부하는 미얀마정부의 배타외교로 캐나다의 구호선박이 입국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등 피해지역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더 큰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피해가 없었던 북쪽 지역에는 쌀이 남아도는데 외국에서 쌀만 사다가 나눠주면 무슨 소용이에요. 밥을 끓일 냄비도 없는데…”

미국의 한인교회들의 도움으로 냄비를 구입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인관일선교사는 폐쇄적인 정부의 태도에 변화를 가질 것을 권유해보지만 “그저 친구로서 도움을 달라는 메시만 전해 듣는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머지않아 곧 자유의 땅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얀마를 굉장히 사랑하세요.” 인관일선교사는 25년 미얀마 짝사랑의 결실이 복음으로 맺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주미얀마 박기종 대사  -  “미얀마는 우리의 파트너 국가”     

1983년 ‘아웅산 폭파사건’과 1987년 ‘KAL기 폭파사건’으로 잘 알려진 인도차이나 반도의 불교국가 미얀마. 동쪽으로는 라오스와 태국이 남쪽으로는 벵갈만과 안다만해를 접하고 있다. 6,000만 명 남짓의 국민이 살고 있는 국토면적은 한반도의 3.5배 정도로 삼림이 57%에 달하는 천연자원의 보고다.

중앙아시아 ‘몬족’이 터를 잡고 인도의 아쇼카왕과 교류를 시작하며 불교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17세기 중엽까지는 프랑스와 독일,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다.

마지막으로 영국군이 퇴각한 후 ‘타킨 아웅산’의 독립운동에 힘입어 1947년 독립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잘못 들어선 군부독재가 계속되면서 폭동과 민주항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1991년 ‘아웅산 수지’의 노밸평화상 수상이후 평화를 위한 목소리들은 더 높아지고 있다.

▲ 박기종 대사
지난 11일 한국교회희망연대(상임대표:이철신목사)는 박기종 미얀마 대사와의 현지 면담을 통해 미얀마를 조금 더 알아갈 수 있었다.

박기종대사는 미얀마를 한국의 경제발전의 파트너라고 확신했다. “외교적으로 향후 20년을 바라보며 함께 발전해갈 수 있는 나라를 아시아에서 찾으라고 하면 저는 미얀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처럼 이미 많은 발전을 이룬 나라보다는 미얀마처럼 자원이 풍부하고 잠재력이 많은 나라와 파트너로 공생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남미에서 멕시코와 브라질처럼 이미 많은 발전을 거듭한 나라보다는 칠레와의 교류가 기대를 모으고 있듯 미얀마도 우리에게 큰 기대를 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잘살기 위해서는 못사는 나라를 잘살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한 박대사는 미얀마와 한국의 문화적 교류의 성공을 자랑했다. “미얀마에서는 한국드라마가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어요. 그래서 ‘안녕하세요’, ‘아빠’, ‘엄마’ 정도의 쉬운 한국어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게다가 김치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박기종대사의 말대로 미얀마 시내 곳곳에는 한국 연기자들의 얼굴이 그려진 드라마 DVD를 파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처럼 한국과 가까워졌고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미얀마이지만 아직은 닫혀있는 나라라는 사실에 무게가 더 실린다.

“미얀마의 현 정부는 2010년 총선을 통해 민간정부로 이양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통치자가 주요장관을 임명할 수 있고 국회의원의 4분의 1을 임명할 수 있으며, 군의 협력이 없이는 국회 75%가 동의해도 힘을 쓰지 못하는 법은 미얀마의 암담한 현실을 대변해줍니다.”

박기종대사는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가 16년 동안 하는 교육을 미얀마는 13년 만에 끝내요.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하면 우리나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과 비슷하죠. 그래도 점차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있어서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학교 학비가 연간 7만5천원 정도로 도시의 학생들은 의지만 있으면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어 대학 진학률도 높아가고 있다.

미얀마에서 4계절 변화의 중요성을 느끼게 됐다고 전한 박대사는 “적어도 1년에 네 번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한국이 축복의 땅인 것 같다”며 “미얀마도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변화와 기회의 땅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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