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영화와 기독교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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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영화와 기독교적 사고
  • 승인 2001.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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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봤어요. 의리를 지키려고 목숨걸고 싸우는 깡패 친구가 나왔어요. 멋있었어요. 나도 저런 친구, 내 대신 목숨 걸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얼마전 일간지에 열여덟살 소년이 사춘기 시절 방황의 길로 접어들었다가 다시 꿈을 갖기 시작한 내용의 특집기사가 실렸다. 소년의 방황은 영화에서처럼 ‘의리있는 친구'를 갖기 위해서 이른바 ‘일진'이라 불리는 학교아이들과 어울리면서부터 시작이 된다.

몇 주전 극장가를 강타한 영화 ‘조폭 마누라’는 버젓이 제목에 ‘조폭' 이라는 단어를 올리고 있을 정도로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선 일진회, 조직폭력, 킬러 등의 폭력적인 단어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부류의 영화들이 흥행하는 이유는 가벼움을 추구하는 10대 후반의 학생들에게 익숙한 코믹 코드로 만족할만한 웃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110분의 러닝타임동안 97번 웃었다”는 등 N세대들의 호응 속에서 폭력영화는 더 이상 무서움이 아닌 웃을 수 있는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의 폭력성은 더해 가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관객들은 그 폭력성에 점점 둔감해지고 있는 지금. 우리 크리스챤들이 간과해선 안될 것이 있다.

‘영적 분별력’

세상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지만 우리에겐 그들과 구분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인간 타락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결과의 참담함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가인이 아벨을 폭력적으로 쳐죽이던 그 사건을 기억하는가? 폭력과 성적 문란이 난무하던 소돔성의 죄악상을 기억하는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늘 민감해 있지 않으면 우리 또한 세상의 흐름과 환경에 자연스럽게 젖어들게 되고 폭력의 테두리 안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과 좋아하시는 것의 분별. 결코 어렵지 않은 것인데도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과 행위를 합리화시키고 있다.

조직보스에게 “꿇어!” 라고 외치는 스크린 속 세상을 보며 마냥 즐거워하기보다 십자가 아래에 무릎꿇고 이 세대를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무엇보다 크리스천 청소년들이 세상에 기준을 두기보다 십자가아래 기준을 두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 있도록 분명하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지윤주(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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