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대학의 세계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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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대학의 세계관〈2〉
  • 승인 2001.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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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인의 바른 안목·삶 키우는 노력 필수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통해서 이 세상에 시작되고 실현된다. 성경이 창조기사로부터 시작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으로 끝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깊은 것이다. 창조기사는 인간의 가치, 위치, 그리고 사명을 보여주는 척도이다.

이러한 척도 안에서만 인간의 올바른 모습을 알 수 있고, 올바른 인간의 모습을 전제로 해서만 죄를 알 수 있으며, 이 둘을 전제로 해서 구원을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인간의 이야기, 다시 말하면, 창조-타락-구속으로 이어지는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그 분의 창조세계 안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다. 따라서 올바른 성도의 모습과 삶을 살펴보려면 창조세계로부터 시작되는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창 조
창조기사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가치, 위치, 그리고 소명을 찾는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에 따라 정확하게 지어진, 하나님의 기대와 축복이 어린 매우 소중한 세상이다. “그 종류대로” 만드신 모든 동식물도 하나님의 세상 안에서 축복을 받은 매우 소중한 존재이거든, 하물며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간직한 인간의 축복은 어떠하랴!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축복이 여기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이 만든 매우 아름답고 선한 창조세계 안에 두셨다.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뜻에 따라 다스릴 것을 사명으로 주셨다. 다스리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과 재능은 물론 하나님의 형상 안에 준비되어 있었다.

창조기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창조주의 소유권 주장하심, 창조세계의 선함, 그리고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에게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기대이다. 칼빈은 창조세계의 선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이 극장에서 도처에 표현된 하나님의 역사를 경건하게 즐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말자”(기독교강요, I. xiv. 20).

인간이 누려야 했던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동료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로 이해된다. 장로교 신학은 창조기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명령인 “정복하고 다스리라”로부터 창조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사명을 찾는다.

타 락
타락 (창 3)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주어졌던 사명의 성취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온 창조세계가 타락했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인간이 창조세계 안에서 가진 가치, 위치, 그리고 사명이 얼마나 컸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인간의 죄는 인간 삶의 전체 영역, 즉 하나님과의 관계, 동료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 나타났다.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으로부터 쫓겨났으며, 남자와 여자는 갈등의 관계로 나아가고, 형제가 형제를 살인하며,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되었다.

타락 이후, 사명을 행함은 말할 것도 없이, 남자는 자신의 기본적인 삶을 위해서 땀을 흘려야 했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실제로 누리고 이어갈 여자는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은 인간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타락 이후 인간에게 엉겅퀴를 냄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구 속
그러나 창조세계 전체에 두신 창조주의 뜻은 인간의 죄로 인해 방해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저주하시는 심판 도중에 구원에 대한 첫 약속을 주셨다 (창 3:15). 온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노아의 홍수 기사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창세기 1-2장이 창조기사라면 창세기 7-9장은 타락한 창조세계에 두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기회라 할 수 있다.

온 세상의 창조로 시작하고 그 전체를 염두에 둔 성경의 시각은 구원의 약속에 관련하여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좁아졌다가, 그의 가족으로,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 넓게 전개되다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모아진다. 그리고 그를 머리로 연합한 모든 교회를 그의 몸으로 두심으로 다시 성경의 시각은 창조세계로 넓어져 간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의 으뜸이자 교회의 머리로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이 가르치는 우리의 구원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골로새서 1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과 관련하여 어떠한 분이신 가를 먼저 말한 후에 그 분께서 이루신 십자가가 이 세상에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매우 분명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그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화평을 이루기 위함인데 그 화평을 이루는 대상은 또한 만물이다. 이러한 화평을 이루시면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

위의 두 서신에서 바울이 가르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루신 구원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라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시므로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후사가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는 것과 함께,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 (롬 8:19-22)을 고대하고 있다.

구원이 만물, 즉 창조세계 전체를 염두에 두고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창조세계는 인간의 구원이 일어나는 단순한 배경이나 무대가 아니다. 창조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과 축복, 그리고 기대가 담긴 소중한 하나님의 세상이다.

그 안의 소중한 인간은 독생자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인간이 구원을 받으면서 창조세계도 같이 하나님께 회복되어 간다. 성경은 시작과 함께 끝도 창조만물에 대한 시각으로 마친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주제는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로 시작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계 21).

성경의 세계관
성경은 인간의 구원역사를 기록하되 창조세계의 시각에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기독교인이 세계관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세계관은, 위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설명한 바와 같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어떠한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하라는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올바른 활동을 찾는다.

장로교 신학은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을 오랫동안 ‘문화소명’이라고 불러왔다. 여기 문화소명이란 좁은 의미의 문화를 의미하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활동을“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힘입어 구원을 받은 성도는 현재 이 땅에 살아간다. 거기서 성도는 쉴새없이 활동한다. 생각하고, 기억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활동은 세상의 만물과의 작용이다. 물건을 분석하고, 만들고, 사용하고, 고치고, 부순다. 성도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가?

여기에 믿음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의 시각이 필요하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은 성도의 삶이 기독교 세계관의 시각에 의해서 형성되어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에게 주셨던 그 가치, 위치, 그리고 소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성도의 삶에 덧붙여지는 악세사리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는 올바른 시각을 말하며, 구원을 받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말해주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안목을 말한다.

심재승(백석학술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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