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르포] “사람이 희망이야 사람이 없으면 희망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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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르포] “사람이 희망이야 사람이 없으면 희망도 없어”
  • 공종은
  • 승인 2008.01.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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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욥 8:21)


성산포. 손끝에 걸릴 듯 건너다 뵈는 바다 위에 우도가 누워있다. 경쟁이나 하듯 그물을 잔뜩 실은 고깃배들이 앞다투어 부두를 빠져나간다. 그 작은 몸체가 넘실거리는 파도에 위태위태하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부서진 파도가 튀어 올라 얼굴을 때린다. 그러나 살을 에는 듯한 날카로움은 없다. 제주의 세찬 겨울바람은 그 퍼런 칼날을 숨기고 따뜻함을 품는다.


흰색……. 생명과 활동이 모두 멈춘 겨울을 그려내는 색이지만 제주의 겨울은 초록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초록이다. 눈덮인 겨울 한가운데서도 지독하게 생명을 피워낸다. 그래서 푸르디푸른 초록이다. 어미의 자궁을 두드리는 생명의 요동처럼, 제주의 겨울이 피워내는 초록의 기운은 생명의 전율이고 희망의 소리침이다.


제주에서는 꽃들도 겨울에 피어난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닷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인한 꽃망울을 피워 올린다. 여기서 어떻게 뿌리가 내릴까 의심마저 드는 바위틈, 척박하다 못해 이리저리 쓸리고 날리는 모래땅에서도 그 강인한 생명력은 어김없이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제주의 겨울바람이 따뜻한지도 모르겠다. 모진 구석이 없다.


바람에는 용서가 담겨있다. 생인손 앓듯 하는 가슴저린 고통이 없다. 오히려 회초리질로 멍든 자식의 종아리에 떨구는 어미의 눈물을 닮았다. 따뜻하다. 몸을 휘감는 감촉이 어미의 손길같다.


땅에는 막힘이 없다. 어디를 가도 길이다. 바람의 길이다. 이리 돌고 저리 돌아 닿은 골목 끝 막다른 길. 거기서 바람의 길이 시작된다. 제주에서는 아무리 높다란 돌담도 바람을 잡아두지 못한다. 숭숭 뚫린 가슴으로 바람을 보낸다.


돌들도 거부의 몸짓이 없다. 아니 태생 자체부터 구멍 숭숭 뚫린 바보같은 품음으로 태어났다. 그 뚫림에 바람이 불면 바람이 담기고, 꽃씨가 담기면 꽃으로 피어난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담을 쌓아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 흔한 바람조차 가두지 못하고, 길의 끝도 끝이 아니다.


아무리 달려도, 어디를 봐도 바다뿐이다. 사방천지 눈길 닿은 곳마다 바다다. 땅조차 물을 가두지 못한다. 오히려 담으려 하지 않는다. 흘려보낼 건 깨끗이 흘려보내는 선택을 한다. 구차한 매달림이 없다. 지난날의 회한, 그 허망한 매달림에 초연하다. 너무 초연한 모습에 차라리 당혹스럽다.



그 당혹감에 고개 돌리면 눈길 닿는 한가운데 한라산이 있다. 동서로 뻗어간 완만함과 남쪽의 급격함을 품은 그 끝자락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사랑원이 있다. 사랑이 뭉텅 묻어날 것 같은 곳이지만 정작 사랑받고 살았던 사람들은 없다. 알코올 중독, 폐인이 다 된 사람들이다. 가족들이 버리다시피 떠맡긴 사람, 길거리에서 부랑인으로 떠돌던 사람……. 모두들 아픈 사연은 다 가슴에 묻었다. 선뜻 이야기보따리를 풀지 못한다. 주저리주저리 풀다보면 눈물 마를 새가 없고 하루 이틀이 부족하다.


모두들 나이보다 10살은 더 들어 보인다. 예전에 다 한 가닥 하던 사람인양 죽어있는 눈빛 사이로 날카로움들이 보인다. 어눌한 말투. 불안정한 눈빛.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았음인지 두 볼에 피어오르는 미소는 해맑기만 하다.


눈앞이 한라산이다.

이 고개 넘고 저 산 굽어 돌면 내 지난날들을 만날 수 있을까. 온갖 희망만으로 높이 쌓아올렸던 그 유년의 파릇한 꿈의 성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희망으로 가는 기차는 늘 한걸음 앞에 있다.


가파른 저 봉우리 올라서면 세상사에 찢겼던 마음, 온갖 욕심으로 물들었던 내 마음 털어내고 다시 설 수 있을까. 환하게 웃는 내 얼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마음속의 바람은 점점 커져만 간다. 이런 소망을 담았기 때문일까. 눈빛들이 아련하다.


이들의 찬송 소리는 맑다. 메마른 손가락이 느린 움직임으로 찬송가를 한장 한장 넘긴다. 구부정한 어깨의 백발노인의 입술이 조금씩 들썩인다.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 날 사랑하신 주 늘 계시옵소서…….” 희망을 담았을까,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린다.    


제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품는다. 땅 끝, 그 절망의 자리, 바다로밖에 더 이상 갈 수 없는 절망감에 좌절할 법도 한데 오히려 이곳에서는 희망을 품는다. 바람이며 구름이며 돌이며 모든 것들이 희망으로 채색된다. 제주의 사람 모두가 희망을 품는다. 사람 사는 곳에 어디 희망만 있겠냐마는 만나는 사람들 모두 내일의 밝음을 본다.


바닷물에 튼 억척같은 손이 해삼 한접시를 썰어내며 말한다. “희망이 별 게 있나. 사람이 희망이야. 사람이 없으면 희망도 없어!”


그래, 사람이 희망이다. 내가 바로 아비 어미의 희망이고 내 아이들이 내 희망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바로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내가 아비 어미의 웃음이고, 내 아이들이 내 웃음이며 즐거움이듯, 이게 바로 희망이다.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욥기 8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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