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르포] 검은 바다에 눈물 흘리는 태안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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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르포] 검은 바다에 눈물 흘리는 태안 주민들
  • 정재용
  • 승인 2007.12.26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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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여 태안주민 생계 막막... 봉사자 발걸음에 희망 얻어
▲ 닦아도 닦아도 검게 물든 바닷물 보며 “미안하다” 눈물 흘리는 주민들

“힘들지 않냐구요?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인 것 같아요.”  

지난 14일 경북대학교 기독교센터(담당:이상욱목사) 학생들은 기말시험을 마치고 계획했던 수련회를 취소한 채 태안으로 달려왔다. 시커먼 기름때로 범벅이 된 얼굴엔 피곤함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기막힌 일을 당한 태안주민들의 마음과 비교할 바 아니었다.  

해양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진 태안 앞바다. 지난 7일 허베이 스피리트호가 쏟아낸 1만 500톤의 기름유출사고는 ‘검은 재앙’ 그 자체였다. 바다와 해안은 온통 검은 물이 들어 있었다. 두꺼운 기름 때가 이미 바다를 삼켜 버렸고 주민들의 생계 마저 삼켜 버렸다. 그나마 사고발생 소식을 듣고 태안으로 달려오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어 회복의 희망이 솟아나고 있다.  

더이상 이전의 아름다운 자태를 찾아보기 힘든 150km의 해안은 자원봉사자들의 다짐에 시위라도 하는 듯 63,000여 태안주민을 위협하는 기름 냄새를 뿜어내며 대치상태에 있다.


# 시름에 잠긴 태안 주민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하나님이 이렇게 큰 벌을 내리시나….” 한해를 기쁨과 설레임으로 마무리해야 할 지금 이순옥집사(모항제일교회)는 근심에 둘러싸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의 입에선 한숨이 마를 날이 없다.  

 기름유출사고로 태안 최고를 자랑하던 이집사의 양식장에는 정성껏 키워온 우럭과 전복대신 시커먼 기름찌꺼기만이 쌓여있다. 맛집으로 제법 알려진 이집사의 식당은 15명의 해녀 할머니와 20여 직원들이 연일 바쁘게 움직이던 곳이다. 하지만 사고 이후 모든 예약이 취소됐고 수족관에 있던 오염되지 않은 우럭 100kg과 전복 200kg도 찾는 사람이 없어 고스란히 냉동고로 들어갔다.  

“이제 여기서는 살 수 없겠지. 당분간 일당이라도 받으며 기름이라도 닦아보겠지만…. 뭐가 달라지려나.”  

눈시울이 뜨거워진 이집사는 말문이 막힌다. 어젯밤, 가족처럼 지냈던 해녀 할머니들과 직원들에게 가게 문을 닫자고 말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앞으로 직원뿐 아니라 자신의 앞 길도 막막할 따름이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기가 막혀 아침에 일어나 기름 닦고, 저녁에는 기도만 하고 있어요. 하나님 뜻을 알 수 없지만 큰 벌을 내리신 것 같아서 매일 밤 잘못했던 일들을 돌아보며 기도하고 있어요.” 

이런 마음은 비단 이집사만의 생각은 아니다. 여느 때 같으면 연말연시 모임으로 손님들이 가득차서 숨 돌릴 틈조차 없을 시기인데 돈으로 환산할 수조차 없는 규모의 피해를 입고 시름에 빠진 태안 사람들의 처지는 동일하다.  

“굴을 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제 기름을 닦아가며 하루를 살게 생겼네요.”

멀리서 찾아온 자원봉사자들이 원주민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검게 얼룩진 바다처럼 주민들의 가슴엔 검은 멍이 들었다.  

정부가 지원하는 하루 5만원의 일당은 사실 이들의 약값으로도 모자랄 판이다. 굽은 허리로 굴을 캐던 할머니들은 검은 돌을 닦으며 호흡기질환과 두통까지 얻게 됐다.


# 새롭게 태어나야 할 태안

사고발생 20일이 지났지만 유출된 1만 500톤의 기름 중 회수된 기름은 10% 가량에 불과하다. 나머지 30%가량은 기화돼 대기를 오염시키고 나머지는 오일볼(기화 후 점성이 커진 기름찌꺼기) 형태로 바다 속을 돌아다니고 있다. 게다가 이 기름들이 날씨가 따뜻해지면 다시 기화돼 대기를 계속 오염시킬 것이라는 사실은 더 참담하다. 


이번 사고는 1995년 있었던 여수 시프린스호 기름유출사고의 두 배가 넘는 양이 유출된 큰 사고였다. 10년이 지난 여수는 아직도 당시 사고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환경운동단체인 환경운동연합은 이번만큼은 시프린스호 때 보다 빠르고 완전하게 복구해 태안을 새롭게 살려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만리포에 긴급대책본부를 설치했다.
 

환경운동연합은 자원봉사 1차 모집에서 2,000명을 예상했으나 2,700명이 참여하는 등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국민들의 복구의지가 대단했다. 하지만 검은 재앙의 크기가 너무 커서 짧은 기간에 회복될 것이라고 희망을 전하기에는 조금 조심스럽다. 

“태안 주민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솔직히 100년이 지나도 복원될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환경연합 지찬혁간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도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지금처럼만 지속된다면 예상밖으로 빠른 복원이 가능할 수 있다며 한 가닥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또 환경운동연합은 초동방재가 늦어 오염 확산 예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비난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유화제 과다사용이 오일볼을 쪼개 오히려 오염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정부의 대응이 적절하고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고 5일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봉사자나 단체들이 상황실의 효율적이지 못한 복구지역배치를 불신하고 자체적으로 피해지역을 찾아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만리포에만 집중됐던 복구의 손길들이 주변으로 분산되면서 기름제거 작업은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들은 정부의 미진한 지원속에서도 태안을 회생시키려는 국민적 의지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에 희망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 피해가 크지만 희망도 크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하루 종일 닦았던 해안이 파도와 밀물에 다시 검게 물들지만 자원봉사자들의 발걸음도 그곳으로 다시 밀려든다. 태안이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다. 

“어제 기름을 닦은 곳에 가보니 또 다시 기름이 묻어 있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계속 닦는 수밖에….”  

NGO 기아대책 김승범간사는 사고 직후 태안에 머물며 기름제거 작업과 함께 무료급식차를 운영하고 있다. 하루 천여 명에 가까운 봉사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지만 이도 많이 부족하다. 단체로 오는 봉사자들은 도시락을 준비해오지만 개별적으로 오는 봉사자들에게는 현장에서 나눠주는 급식이 절실하기에 기아대책의 무료급식차는 아주 큰 몫을 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힘은 개인봉사자들이었다. 태안군청은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는 문의가 폭주해 업무가 마비가 될 정도였으며, 각종 단체들과 인터넷 커뮤니티는 봉사에 참여하자는 여론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20여 일 동안 태안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의 수는 30만이 넘었다. 이들이 걷어낸 기름의 양만 1천여 톤이 넘는다.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잠자리에 들지만 내일이면 또다시 똑같은 기름을 닦아내야 하는 힘든 작업 속에서 봉사자들은 이를 악물었다.  

“바다의 생명력을 믿어보는 수밖에 더 있겠어요. 사람이 저지른 죄, 사람의 힘으로 용서를 구해야죠. 그래도 조금씩 제 색을 찾아가는 바다와 해변을 보며 희망을 얻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저 뿐 아니라 국민들 모두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희망은 함께 마음을 모을 때 큰 힘을 발휘하니까요.” 

한 자원봉사자의 말처럼 ‘희망’은 아직 남아있다. 변하지 않은 관심과 변하지 않는 기도만이 태안을 살릴 수 있다.  

붉은 해가 저물자 바다도 검붉게 물들었다.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듯, 6만 여명의 태안주민들은 상처입은 바다에게 “미안하다” 용서를 구하며 다시 푸른 제 모습을 돌려주마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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