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목숨 걸고 순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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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목숨 걸고 순종합니다”
  • 현승미
  • 승인 2007.10.11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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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하며 실천적 신앙의 길 걸어온 김선운 목사

2007년, 지난 1907년 길선주장로로부터 시작된 회개와 부흥운동이 올해로 꼭 100년이 되었다. 올 한해 한국교회는 그때의 회개와 부흥의 물길을 일으키기 위한 크고 작은 기념행사를 치렀다. 그러나 대다수의 행사가 마무리 된 지금 한국교회는 별다른 부흥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80세의 김선운목사는 소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굳건히 세우며 평생을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목숨 걸고 순종하는 실천적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에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 시대는 학문적 지식이 아닌 실천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진실로 거짓됨 없는 성결한 신앙인이 부족해요.”

이민목회를 하는 중에도 1973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한국을 방문해 말씀을 전해 온 김선운목사. 실천적 신앙인으로 잘 알려진 그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정확한 지식이 있다면 한국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어려움은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에 한국을 방문합니다. 이제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믿음의 풍조가 바뀌어 저를 찾는 교회도 몇 안 되지만, 결코 소홀함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믿음에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가짜학위문제로 사회전체가 흔들리고 있지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짜 학위를 취득해 자신의 출신배경을 속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회개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를 결코 보장할 수 없습니다.”

김선운목사는 특히 신사참배한 목사들이 회개하지 않고 목회를 계속하고 있는 것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했다.

그는 일제 시대에 이동소학교를 다녔다. 4학년 무렵 일제는 소학교 학생들까지 강압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어린 나이에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혹독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꼬박 3년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도 신사참배를 거부해 주기적으로 열리는 장터에서 군중들이 보는데서 뺨을 맞고 벌을 서는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핍박을 당하고 있었죠.”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일을 알릴 수가 없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남몰래 울면서 기도할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당시 교감이었던 하창수선생 덕분에 소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반대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김목사는 해방 이후에 비로소 서울 경신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그의 학문에 대한 열의는 그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았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그는 한양공고에서 영여 교사로 재직하며 수 백 명의 학생들을 전도했다. 김목사의 교육과 전도에 대한 열의는 이민을 가서도 계속됐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템플대학교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전공했다.

“제가 유학하던 60년대에는 ‘하나님은 죽었다’는 이른바 사신신학의 열풍이 구미 학계에 만연했습니다. 당시 템플대학교에서 제 지도교수 중 한 명이었던 밴뷰런은 대표적인 사신신학자였죠. 하지만, 제가 가진 믿음이 있었기에 절대 타협할 수 없었지요.”

그 당시는 사신신학을 인정하지 않는 글이나 논문은 제출 자체가 불가능한 분위기였다. 졸업하기 위해서 신앙이 있다고 하던 미국학생들이나 한국유학생들도 본의 아니게 사신신학을 인정하고 통과한 예가 적지 않다. 그러나 김선운목사는 그가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사신신학과 싸우며 논문을 쓰느라 6년 이상의 세월을 더 보내기도 했다.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밴뷰런과 정면 대결을 했습니다. 몇 시간의 격론 끝에 밴뷰런이 패배를 승인했죠. 두 손을 들더니 나를 안고 한참을 우셨어요. 사실상 그 뒤로 사신신학이 조금씩 사그러 들었지요.”

이후 템플대학교를 시작으로 대학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며, 학생들을 전도했다. 그러나 매 학기 바뀌는 학생들을 전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특별히 한국인들을 교육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한인교회를 개척해 38년간 봉사했다.

목회에 전념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큰 명예와 특권인 미국 대학의 교수직을 포기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처음 목회를 시작한 몇 년 동안은 무보수로 시무했고, 은퇴하면서까지 교회 빚을 갚기 위해 거의 전 재산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 그의 평생 소원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보는 것이다. 진실로 거짓이 없는 올바른 믿음의 크리스천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1950년대에 마산 제2문창교회에서 초대 고려파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제가 22살의 나이로 용소교회의 대표로 참가했죠. 부산 고려진영 전체가 연합하는 자리에 나가 눈물이 터지고 강대상이 쪼개질 정도로 회개를 부르짖었죠. 얼마 전 한 전도사를 만났는데,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60세가 가까이 된 나이의 그 전도사는 당시 초대 고려파 대회의 진행을 담당했던 청년이었다. 그때의 눈물의 회개를 기억하고자 쪼개진 강대상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다고 했다. 다시 한 번 그때의 회개와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고자 김선운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하지만, 그의 나이 여든. 그 중 사십 해를 낯선 땅에서 살아왔다. 비록 매년 국내에 초청돼 집회를 이끌었지만, 이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것을 우려해서였을까. 그는 평생에 걸쳐 많은 글을 썼다. ‘기독교 신조해설’, ‘로마서 주석’(5권), ‘기독교종교철학의 정립’(8권) 외에도 기독교 종교철학의 계속이라고 할 수 있는 40권에 달하는 설교집과 ‘기독교의 교육철학’ 및 자서전 ‘외로운 사람’을 집필했다. 그 중에도 특히 ‘기독교종교철학의 정립’의 경우 스터디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김선운목사의 실천적 신앙을 이어받고자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서울 영동교회에서 이 책을 통해 김목사의 신앙을 전수받고 있다. 그가 평생을 통해 알리고자 했던 실천적 신앙을 통해 변화하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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