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대학의 세계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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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대학의 세계관〈1〉
  • 승인 2001.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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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학문’통합에 큰 성과… 기독교 대학의 차별성 두각

얼마 전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창조와 진화에 대한 논쟁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방송의 촬영이 끝난 후 그 프로그램의 PD가 진화론을 옹호한 교수에게 물었다: “제가 알기로 교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시고 장로님이신데 어떻게 진화론을 옹호하고 가르치십니까?” 교수가 대답했다. “저는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물리학은 나의 학문이고 기독교는 나의 개인적인 종교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이 대답 속에는 물리학은 공적으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학문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야 하고 기독교의 믿음은 개인적인 것, 또는 사생활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적인 학문 활동과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다시 말하면, 학문과 믿음은 서로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그 둘은 서로 관계도 없고 따라서 모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지금부터 논의하는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서 구원을 받는 영적인 것에만 국한되어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삶 전체에까지 연장되어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만 답을 얻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대학이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약 그 답변이 전자라면, 다시 말해서, 믿음이 구원의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독특성은 불가능해지고 기독교 대학이란 개념도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만약 그 답변이 믿음이 삶에 연장된다는 것이라면, 믿음은 학문의 영역에도 연장되어야 하고, 따라서 구체적이고 독특한 기독교 대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 대학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학문의 영역에 연장해서 믿음의 기초와 원리로 학문적인 작업을 하는 대학이다. 따라서 기독교 대학은 믿음과 학문의 통합을 추구한다.

세계관의 충돌:
이원론과 성경적 세계관

위에 언급한 대화는 전형적인 이원론의 사고의 예를 보여준다. 이원론이란 세상이 서로 대립되는 두 세력이 다스리는 두 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을 말한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시각을 의미한다. 이원론이 말하는 세상의 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고 다른 부분은 사단이 주관하는 세상을 말한다. 위의 예로 볼 때, 물리학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렇게 이해되는 세계관 안에서 이 세상은 죄 되고 썩고 망할 세상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을 멀리할수록 좋은 것이며, 결국 거기서의 삶은 신앙생활에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구원이란 바로 그러한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구원의 내세적인 축복이 여기서 강조된다.

세계관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 대학 또는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앙 자체의 이해가 달라지며, 신앙생활의 모습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과 사단의 것으로 양분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일반적으로 구원받은 삶은 교회의 삶으로 한정되고, 교회 밖에서의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단지 ‘도덕적인’ 삶으로 간주된다. 이럴 때에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 구원받아서 천국의 시민권을 받는 것,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한정된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 구원의 중요성과 함께 창조세계 전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도 중요하게 강조한다. 요한복음 3장은 영혼이 거듭나야 할 것과 함께 또한 세상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로마서는 (4장) 또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21)며 세상의 구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성경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반대하여, 하나님께서 창조세계 모든 것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일관되게 가르친다. 사실 칼빈주의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은 창조의 시각에서 옳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를 선하게 지으셨으며, 그 창조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세계를 버리시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세계관을 성경이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세상’ 자체가 아니라 ‘세상적인’ 삶이다. 그리스도인이 버려야 할 것은 ‘세상’ 자체가 아니라 세상에서 살던 ‘옛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새로 얻어야 할 것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새사람’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언제나 죄된, 더러운, 버려야 할 세상이 아니다. 물론 세상에서 ‘세상적으로’ 사는 것은 정죄를 받는다 (약 3:14-15). 그러나 세상 자체가 하나님과 대항하는 악의 세력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요한복음 3:16-17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 골 2:20, 딤전 6:7, 딛 2:12, 벧전 5:9). 세상은 죄로 심판받아 저주 아래 있으나 (엡 6:12),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실 자신의 창조세계로 보고 계시다.

성경은 만물, 다시 말하면 세상 전체가, 그리스도께 복종할 것을 비전으로 바라보고 있다 (빌 3:21, 고전 15:27-28, 엡 1:21-22). 골로새서 1장은 이러한 내용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15-17절은 그리스도와 만물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만물이, 다시 말하면, 세상이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그는 만물의 으뜸이요 근본이시다. 이런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화평’을 이루는데, 화평을 받는 대상은 곧 만물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하나님]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0절).

만물을 하나님께 화목하게 하는 과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18절).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부터 시작해서 만물을 회복해 가신다 (엡 1:22).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만물의 근본이요, 으뜸이시기 때문이다.
<계속>

심재승(백석학술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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