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마음 허락하심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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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마음 허락하심에 감사해요”
  • 현승미
  • 승인 2007.09.1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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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대를 이어 하나님 성전 건축한 구 성 옥 권사

낯선 미국 땅. 생김새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곳. 매일 이질적인 문화 가운데서 삶과의 치열한 전쟁을 펼쳐야 하는 곳에 든든한 신앙의 뿌리를 내린 사람, 구성옥권사(뉴저지양지교회·장두만목사). 그는 3때 째 내려오는 믿음의 집안에서 다져진 신앙을 통해 이민사회를 변화시키고 그 곳에 하나님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얼마 전에 친척 언니들과 함께 가족모임을 가졌어요. 그때 언니들이 제가 집안의 대를 이었다며 다음 대에는 누가 대를 이을지 기대된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구성옥권사의 할아버지는 일본에 교회를 지으셨다. 아버지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에서 장로가 되셨다. 어머니는 친가, 외가 모두가 믿음 생활하고 교회 다닐 수 있는 전도자의 역할을 하셨다. 그 믿음의 대를 이어 미국에 교회를 건축하게 된 것이다.


“간호대학을 졸업한 후 남편을 따라 곧바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니까 벌써 34년, 35년 정도 됐어요. 당시 남편이 이민 갈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에서 배우자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약혼만 하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됐어요.”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다


오랜 교제의 시간도 없이 오직 믿음 하나만으로 남편과 여생을 함께하기로 작정한 구성옥권사. 하나님의 사람을 만났기에 낯선 땅에서도 서로를 의지한 채 화목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뜨거운 신앙으로 무장돼 있던 두 부부에게 이민사회의 신앙활동은 갈증을 느끼게 했다.


“그때는 이민 초창기라 교회가 많이 약했어요. 처음 이민간 곳이 장로교의 본산지인 필라델피아로 목사도 많고, 이민자도 많았지요. 그런데 이민사회 자체가 너무 바쁘고, 성도도 10명에서 15명 정도에 불과했어요.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안됐지요.”


한국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성서주일, 유년주일학교, 십일조 등 성도가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하며 서리집사로서 사명을 감당하던 그에게 이민교회는 너무 열악했다. 그러나 이미 어릴 적부터 가정예배가 몸에 배어 있었다. 2남 3녀의 아이들과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생활을 굳건히 했다. 구성옥권사는 간호사로, 그의 남편 이집사는 공인중개사 라이센스를 딸 수 있었다. 구권사 부부는 이미 그때 교회 제정을 다 부담할 수 있었다. 동네의 믿지 않는 이들이 그들을 모델로 삼았다.


춤추던 곳이 예배의 장소로


남부뉴저지. 두 부부는 조용한 바닷가에 집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집 지을 때 축복의 근원이 되는 집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아예 부흥집회 오시는 목회자들을 위해 방을 따로 설계했지요.”


사람 좋아하고 음식 만들기 좋아하는 구권사의 집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집이 건축된 후에는 오디오 시스템까지 갖추고 당시 첫 선을 보이던 가라오케를 들여놨다. 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서 매주 토요일이며, 특별히 부르지 않아도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한 번 모이는 인원이 25명 정도 됐어요. 이민생활의 외로움도 달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죠. 다들 믿음 생활하는 친구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느 날 그러지 말로 찬양 부르자는 제안을 했어요.” 그렇게 대중가요를 부르면 춤추던 그곳이 예배의 장소로 바뀌었다. 매주 토요일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삼삼오오 모이면 기도시간을 갖고 찬양을 부르는 은혜 충만의 시간으로 변화됐다.


“찬양과 기도는 있었지만, 말씀이 부족했지요. 그때 다니던 신학교에서 장두만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어요. 장목사님은 이민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만남의 축복으로 함께 주의 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중이셨대요. 매일 매일 갈급함으로 주의 종을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저희 부부와 장목사님이 하나님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거지요.” 그때부터 구권사 부부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예배가 시작됐다.


“미국은 한국과 달라요. 예배를 드리려면 교회를 빌려야 하거든요. 그래서 예배장소가 마련되기까지 6개월 여 간을 집에서 예배를 드렸지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목사님과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다. “목사님께서 목회에만 전념하시려면 우선 가정이 편해야 하잖아요. 당시 어머님까지 일곱가족이 함께 쉴 수 있는 공간을 제일 먼저 마련해드렸지요.”


다음은 두 부부의 노후대책. 아이들도 사립학교로 떠나보내고, 본격적으로 교회건축에 대한 비전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가정의 안정과 물질 축복 주신 것도 감사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부부가 똑같은 마음으로 섬길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게 해주신 집을 팔아서 교회를 짓자고 약속했어요. 대신 그곳에서 방 한 칸을 내어 살며 남편은 교회 정원을 가꾸고 나는 음식으로 교회성도들을 섬기자고 노후대책을 세웠죠.”


‘주의 종’ 섬기게 하심에 감사


그렇게 주의 종을 섬기며, 교회 건축에 대한 비전을 세우고 있던 구권사 부부에게 예기치 못한 연단이 다가왔다. 그 부지런하던 남편 이집사가 갑자기 피곤해하며 복통을 호소했다. 결국 남편 이집사는 간암판정을 받고 3개월 만에 하나님의 곁으로 떠났다. 항상 삶을 준비해온 덕분에 물질적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남편의 사망 보험금이며 세탁소 수익이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돈이 감당이 안돼서 성경책 속에 껴 넣거나 서재 아무데나 방치해뒀어요. 힘들어하는 저를 위해 목사님 사모님이 집에 같이 와서 주무시곤 했는데, 그때 그 돈을 모두 교회 건축에 쓰겠다고 말씀 드렸지요.”


교회 개척 3년 만에 성전건축을 시작했다. 그에게 감동 받은 성도들도 십시일반 건축헌금을 내놓았다. 예배당 친교실 짓고 다시 3년 만에 아이들 교육관, 목사님 사무실 등 8년 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자신이 하던 사업마저 모두 접고 오직 교회봉사에만 힘쓰고 있는 구성옥권사. 그는 수양관식으로 지어놓은 교육관이 목회자들에게 쉼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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