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운동, 신앙수준-성경교육 높이고 연합운동 촉발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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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운동, 신앙수준-성경교육 높이고 연합운동 촉발시켜
  • 송영락
  • 승인 2007.08.2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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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감리교가 벽 넘어 하나의 민족교회 설립 움직임으로 발전

부흥운동의 효과는 전적으로 훌륭했다. 즉 교회의 신앙수준이 더 높아졌고, 미리 자상한 성경교육이 있었으므로 광신은 거의 없었고, 정신 이상 같은 결과는 하나도 없었고, 수천 명의 신도가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세웠고, 다수인에게 성직의 소명을 받게 하였고, 그보다도 더 많은 교회들이 성경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무려 2천 명의 대집회가 한 장소에서 거행되었으며, 수천 명이 글 읽기를 배우고 기독교를 알아보려고 문의하며, 술주정꾼, 도박꾼, 도적놈, 오입쟁이, 살인, 도박, 광신적 유학자들, 구태의연한 불교신도들, 수천 명의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옛 것은 모두 다 지나가고 말았다.

 

길선주는 강단에서 교인 자녀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금하는 것은 물론 담배공장에 나가 일하는 것도 금하도록 촉구했고, 교인들이 그대로 실천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창 발흥하고 있을 때 길선주는 제임스 게일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현시하시지 않으셨다면 한국교회는 단지 외형적으로만 대단했을 것이고, 사탄이 지배했을 것이며 그리고 단지 극소수만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는 그 축복을 어떻게 말할 수도, 하나님이 행하신 이 모든 것을 글로 쓸 수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성령께서 여기 현시하셨던 것처럼 당신 위에도 부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교회성장의 동력

한국교회의 부흥운동 기간 동안 놀랍게 성장했다. 아더 브라운이 북장로교 해외선교 100년사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평양에서 2,000명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였습니다. 교회가 차고 넘쳐흘렀기 때문에 혼잡을 피하기 위해 남녀가 시간을 나누어 모여야 했습니다. 그 모임들은 깊은 감동과 뜨거운 기도를 동반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한 밤중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숫자는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보고였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한창 발흥하던 그 때 평양을 방문했던 고포드가 증언하는 것처럼 1907년 1월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고 나서 1907년 중엽까지 3만명의 회심자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원산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과 백만인구령운동은 “출석교인의 대단한 증가”로 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가져다주었고, 전도열을 고취시켰으며, 부흥의 열정을 한국교회 안에서 각인시켰다.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교회에는 전도열이 뜨겁게 달아올라 민족복음화운동과 해외 교포에 대한 전도열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 영국 주교가 런던 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의 놀라운 권능의 현시”를 요한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비견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1884년 개신교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하고 약 20년이 지난 1905년 한국교회 교세는 약 5만 명으로 급증했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선교 25주년을 맞는 1909년 교세는 약 20만으로 증가했다. 특히 1903년과 1907년 사이에 평양지역의 교세는 놀랍게 급증했다.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면서 1906년 1월 장대현교회는 네 번째로 산정현교회를 분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3,000명으로 급증하자 불가불 주일예배를 여자를 위한 1부 예배와 남자들을 위한 2부 예배로 나누어 드렸다. 개성 지역도 1907년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교세가 500명으로 증가했고, 1910년 백만인구령운동 기간 동안에 열린 한 달간의 부흥집회에서 2,500명이 회심하는 놀라운 결실이 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서울지역 교회들 역시 놀랍게 성장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고포드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교회마다 교인들로 만원이었고, 서울 지역의 한 선교사는 6주간의 전도여행 동안 50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700명을 학습교인으로 세웠으며 자신이 맡은 한 시찰에서는 5개 교회가 일 년 만에 12개로 급증했다고 보고했다. 1910년 한 해 동안 서울에서 13,000명이 새로 입교했으며, 서울 시내 감리교회에서는 그해 3천명이 세례를 받았다. 부흥운동을 통과하면서 시골지역 교회들도 놀랍게 성장했다. 1907년 이전 4,247명의 교세를 가지고 있던 강화지역의 경우 1907년 부흥운동을 경험하면서 교세가 급증하여 섬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 교인이 되었다. 그 후 강화도 교인들은 섬 전체가 복음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대구 지역 교회들도 부흥운동 이후 놀라운 성장을 경험했다. 교회들이 “우후죽순 같이”일어났고, 회심자들도 1905년 1,976명, 1906년에 3,867명, 그리고 1907년에 6,144명으로 급증했다.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던 아담스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보고했다. “지금은 내가 일찍이 가보지도 못해 본 지방에까지 교회들이 섰으며, 전도자들이 아직 방문도 못해 본 교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선교사나 전도자 없이도 형성되었습니다. 대구시에서 복음을 들은 어떤 사람은 성경 한권을 구해가지고 고향 마을로 돌아가서 이웃 사람들에게 그것을 계속 읽어주는 중 50명의 신도를 얻게 되었습니다.”

 

1899년에 선교부가 결성된 선천의 경우 1907년 부흥운동을 경험한 후 교세가 15,348명으로 증가했다. 이 숫자는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숫자가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면서 헌금생활을 하는 신실한 신자들을 말한다. 1907년 한 해 동안 선천읍교회는 근처 시골에 다섯 교회를 개척했다. 푸트의 증언에 따르면 강원도 동해안 어느 교회는 주일 저녁에 2,500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그 도시 총 인구가 3천명이었다.

 

도시 인구 거의 대부분이 교인이 된 것이다. 블레어 선교사가 맡고 있는 압록강 하류 서해안에 근접한 용천군에는, 군 한복판에 350명이 모이는 교회, 용천읍 북방 1마일 지점에 250명의 교회, 동북방 5마일 지점에 400명의 교회, 동방 2마일에 750명 교회를 비롯하여 용천군에만 자립교회가 14개나 되었다. 이처럼 1907년 부흥운동을 경험하면서 전국 어디에서나 교회들이 놀랍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미 1903년부터 일기 시작한 부흥의 열기가 1907년에 접어들면서 절정에 달한 것이다.

 

1906년 12월 26일, 엘리스가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한국에 100명의 새로운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추천한”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선교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와 같은 선교회의 청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북장로교 선교회의 경우, 1908년 22명의 새로운 선교사들이 보강되었고, 다시 1909년에 14명이 보강되어 부흥운동 후 선교사들이 43%나 보강된 것이다.

 

연합운동

마지막으로 이 시대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결실은 복음주의적 연합운동이다.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유대인이나 야만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20세기 초 한국에 발흥한 부흥운동은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을, 원수와 원수를, 양반과 천민을, 형제와 자매를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으며, 더 나아가 본국에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벽을 넘어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으로까지 발전했다.

 

부흥운동의 촉매 역할을 했던 사경회에는 장감이 연합으로 모였고, 장감은 서로 강단을 교류하면서 한국의 복음화를 함께 염려했다. 원산부흥운동의 발흥과 저변 확대로 장감이 성령 안에서 교파의 벽을 넘어 하나 되면서 연합운동은 급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한국에 파송된 장감선교사들 모두가 이 일에 적극적이었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 1890년 예수셩교서회(기독교서회 전신), 1893년 성서번역실행위원회, 1905년 복음주의 연합공의회, 1906년 숭실대학, 1915년 연희전문학교, YMCA, 주일학교연합회에 이르기까지 협력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심지어 장로교와 감리교 6개 선교회는 1905년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를 결성하고 비록 실현되지 못했지만 한국에 하나의 민족교회설립을 모색할 정도였다.

 

부흥운동은 교회와 주님을 향한 헌신을 한층 강화시켜주었다. 여기 그리스도인이 된 지 10년이 된 한 건강한 사람이 한국의 북쪽에 살고 있었다. 이 젊은이가 주님을 영접한 것은 군대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구원의 진리를 기독교에서 발견한 것이다. 일단 교회에 합류하자 그는 과거 진리에 대한 갈급함과 운둔생활을 할 때의 절제된 성결에 대한 추구와 같은 종교적인 열정으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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