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 빛나게 할 장식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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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 빛나게 할 장식품"
  • 이현주
  • 승인 2007.08.21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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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전8기의 도전인생 사는 '평강한의원' 이환용원장



 

서울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강남역 먹자골목. 그 초입에 아주 작고 초라한 간판이 보인다. 전국 각지에서 명약을 찾아 모여든다는 한의원 건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한참을 둘러 본 후에야 도화지만한 초록색 간판에 ‘평강한의원’이라는 글씨가 눈에 띠었다. 낡고 초라하긴 한의원 내부도 다를 바 없었다. 여기저기 약봉지가 쌓여 있고 입구에는 환자들이 대기하는 오래된 3인용 소파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알레르기 비염에 특효라는 ‘청비환’으로 10여 년간 수십억 원이 넘는 수입을 올린 평강한의원은 새 옷 한번 갈아입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켜왔다. 낡고 초라한 병원의 모습 속에서 그 곳을 지켜온 이환용 원장(사랑의교회 안수집사)의 고집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번 목표한 일을 시작하면 포기할 줄 모른다는 이환용 원장의 인생을 들어 보았다.


사실 꿈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꿈을 이루기 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하지만 이환용 원장은 단 한 번도 꿈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여덟 번의 시험을 치룬 후에야 한의대에 들어갔다. 후회는 없었다. 남들보다 출발이 늦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난이 만들어 준 끈기와 도전

초등학교 3학년. 친구들과 한참 뛰어놀 나이에 소년은 지게를 지고 다녔다. 보리농사를 짓고 풀을 베어 소를 먹였다. 볏단을 나르고 김을 맸다. 어린 나이에 일을 하는 것은 소년 혼자뿐이 아니었다. 그의 누나도 형들도 모두 학업을 중단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충청도 서산의 시골마을에서 아비를 일찍 여읜 아이들의 일상은 고단했다.

홀로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는 하루 종일 남의 집일을 하고 60원을 벌어 오셨다. 그나마 일거리가 없는 겨울이면 아침과 저녁 두 끼를 간신히 때우며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어린 시절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도 소년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40년이 흐른 지금도 이환용원장의 모습에선 시골 내음이 남아 있다. 웃으며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원장은 “그 때의 고생은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골 소년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시절, 누나의 배려로 서울로 유학을 오면서 부터다.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 웅변도 했고 학교에서 유도반에도 들어갔다. 문제는 다른 취미활동에 치중하다보니 성적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 공부해도 늦었다 싶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버스에서 사고를 당해 수개월동안 병원신세를 지고 목발을 짚어야 했다. 공부는 거의 포기상태였다. 아픈 다리를 고치려고 한의원에 다니고 지압원에서 침도 맞았다. 치료를 받던 그는 아예 원장에게 침놓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조르고 졸라 배운 침술과 지압은 그의 인생에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그래, 한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자. 한번 해보는 거야.’


8수 끝에 한의대에 들어가다
 

내신등급 꼴찌의 가슴속에 ‘한의사’의 꿈이 모락모락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내신도 엉망이고 예비고사도 떨어졌다. 한마디로 대학에 갈 가능성은 희박했다. 여유가 있어 학원을 다니며 맘 놓고 재수할 형편도 아니었다. 가진 기술이라고는 침술뿐. 그는 독서실에 침을 놓아주고 밥을 얻어먹으며 재수를 시작했다.


삼수, 사수... 군에 가서도 영어사전을 외워가며 훈련을 받았다. 오수, 육수...한의대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자그마치 일곱 번 떨어졌다. 또래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할 나이에 그는 아직도 독서실에서 막내동생뻘 되는 아이들과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답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 그가 만든 평강식물원에 지난해 노대통령 내외가 다녀갔다.
“하나님, 정말 제가 한의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문과출신이고 내신은 꼴찌에 학비도 없습니다. 도대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긴 한가요?”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졌다. 그는 그렇게 7년을 버텨왔다. 198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무려 8년 만에 그에게 입학의 기회가 주어졌다.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하나님, 드디어 제가 한의사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환용 원장은 목적을 품으면 하나님께 바로 기도하는 버릇이 있다. 8수를 하는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그는 항상 하나님께 길을 물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뜻하는 바가 있으면 기도를 했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았다.

강남역에 한의원을 차리게 된 것도 그의 기도였다. 국내 최대의 고산식물원인 ‘평강식물원’을 포천에 만든 것도 기도로 이룬 일이었다.


한의사 고시를 앞두고 당시 서울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강남역을 찾아간 그는 뉴욕제과 옆 골목을 지나다가 ‘바로 이곳에 한의원을 세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4살배기 아들과 경주 보문단지를 돌다가 초록이 우거진 숲을 보며 그 자리에서 아들과 함께 ‘이와 같은 아름다운 대지를 달라’고 기도했다. 기도는 그에게 확신이나 다름없다. 열악한 상황은 문제가 아니다. 기도하면 모든 꿈이 이뤄진다고 이환용 원장은 굳게 믿고 있다.


강남역에 한의원을 차릴 당시 그의 수중에는 40만원뿐. 하지만 결국 그는 한의원을 세웠고, 코질환을 치료하는데 명약으로 알려진 ‘청비환’을 개발했다.

`청비환`으로 전국각지에서 환자 몰려

“사실 한의원을 차렸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죠. 저 역시 대출 이자 갚느라 빠듯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랜 시간 저를 연단시키신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죠. 노량진에서 공부하던 시절, 이웃 한복집 할머니가 나무껍질 하나로 만성 코질환을 치료하는 것을 목격했어요. 코나무 껍질이라고 알려주신 약재는 참느릅나무였죠. 한의사가 된 후 저는 느릅나무 껍질을 연구했고 새로운 약을 개발했습니다. 바로 청비환이죠.”


청비환의 효능이 입증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빚을 갚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정도로 예약 환자가 밀려있었다.

“세무서에서 갑자기 많은 소득을 신고한 것이 의심스럽다고 할 정도였으니, 정말 돈을 많이 벌었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시골 촌놈이, 그것도 7번이나 낙방한 끝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이겨낸 저에게 하나씩 하나씩 칭찬과 격려를 해주셨어요. 절대로 하나님이 먼저 포기하는 일은 없으시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저에게 많은 상을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돈을 많이 벌게 되었으니 병원도 화려하게 치장하고 좋은 집에 좋은 옷에 사치를 부려도 뭐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허름한 병원을 그대로 두고, 아직도 전셋집에 살고 있다. 두 아들은 외국에 유학 가 있지만 “너희들에게 들어간 학비만큼 다른 아이들도 공부를 시킬 것”이라며 매년 3천만 원을 장학금으로 내놓는다.

그밖에 그가 번 많은 돈은? 물론 모두 식물원에 들어갔다. 8년 공사 끝에 세상에 첫 선을 보인 포천 ‘평강식물원’은 이환용 원장은 꿈이자, 어린 시절 그를 키웠던 고향이다. 아들과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던 식물원의 꿈은 남한의 북단 포천에 자리 잡았다. 추위가 심한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서 국내에서 보기 힘든 고산식물을 심기로 했다.

 
어린 시절의 향수 `평강식물원`을 만들다

지게를 지고 가다가 힘들면 주저앉아 땀을 식혔던 고향의 동산. 그는 모든 이들에게 잃어버린 옛 시골의 고향을 찾아주고 싶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태초의 동산을 통해 쉼과 휴식을 주고 싶었다. 히말라야 고원에서 제주도에서 백두산에서 희귀한 식물들을 들여왔다. 심고 가꾸길 수년. 식물원조차도 평탄케 완성되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로 얼어 죽고, 몇 년만의 폭우로 식물들이 물에 떠내려갔다. 심지어 100년 만에 처음이라는 가뭄까지... 마치 이환용 원장을 연단시키듯 하나님은 식물원의 식물들마저 연단시키고 계셨다.


땅에 밟히는 질경이 하나도 귀한 약초가 될 수 있고 연못에 모여든 개구리와 나무 숲을 뛰어 다니는 고라니를 보며 숨쉬는 곳으로 모여드는 생명의 이치를 배운다. 식물원에서는 매주 주일예배를 드리고 사목을 두어 직원예배도 인도한다.


올해 이원장은 장로임직을 추천받았다. 사랑의교회에서 장로직분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손사레 쳤다.

“장로직은 십자가를 지고 섬기는 자린데... 제가 식물원에서 매주 예배를 드리느라 교회를 위해 잘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라니요. 제가 할 일이 아니었죠. 그저 성실히 헌금을 드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창조과학회와 코스타 후원이사로 활동하고 오엠선교회에도 참여하고 있는 이환용 원장은 믿음의 동산 평강식물원 안에 선교사들이 안식할 수 있는 선교센터를 세우고, 하나님의 비전과 자연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학교도 설립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식물원 하나로 시작했지만 식물원이 씨앗이 되어 교육과 선교, 믿음의 훈련이 가능한 비전센터를 완성하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다.

“도서관에서 하루 3천원으로 생활하던 내신 꼴찌의 초라한 학생에게 성공이 있을거라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를 품에 안아 주셨고 믿음의 확신을 주셔서 수많은 낙방과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게 하셨어요. 오히려 꿈을 주셨고 그 꿈을 이루는 지혜를 주셨죠. 고난과 어려움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 빛나게 만드는 장식품이라는 사실을 저는 몸소 체험했을 뿐입니다.”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 이환용 원장.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목적’을 세워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그의 인생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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