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 평양, 기도와 찬송으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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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지 평양, 기도와 찬송으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변화
  • 송영락
  • 승인 2007.07.04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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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교수의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 대부흥 이야기' <8>

성령의 역사는 미션스쿨 학생들 가운데 연일 계속됐다. 그 다음날 목요일, 1월 17일 아침에도 수요일과 마찬가지로 강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고, 그날 예배는 정오까지 계속됐다. 금요일에도 그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어 금요일 오전은 수요일 아침이나 목요일 아침과 같이 회개와 눈물과 기도로 보냈다.

 

이처럼 장대현교회 사경회 마지막 이틀 동안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사경회가 끝난 16일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고 남녀 학생들 가운데 계속됐다. 상당수의 남학생들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여러 시간 동안 대단히 비통에 젖어”있었고 여학생들도 “진실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런 후 교실을 가로질러 자신들이 범한 몇몇 사람들의 손을 잡고 용서해 줄 것을 요청했다.”


평양전역으로 확산되는 불길

1907년 1월이 가기 전에 상당수의 평양의 교회마다 영적대각성운동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 시작했다. 이길함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감리교회도 마찬가지로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을 공유했으며, 결코 전에는 불가능했으나 이제 평양은 한국전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선교사, 한국인, 장로교인, 감리교인, 남학생, 여학생, 선생, 교회직분자, 모든 계층과 신분의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합심하여’ 한 사람같이 드리는 기도이다. 비공식적으로 그러나 성령으로, 성령에 의해 완전히 조직되어 그들이 평양시내와 한국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감리교 선교사 웰즈의 지적처럼 성령의 역사가 장로교를 넘어 감리교에서도 놀랍게 확산되었다. 2월 24일. 일요일,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무어는 바로 그 다음날 25일, 월요일 감격과 흥분 속에 “어제 평양은 놀라운 날, 아니 가장 놀라운 날이었다”고 보고했다. 그 현장에 참여하여 평양에서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을 직접 목도한 감리교 선교사 노블도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보내 왔다.

“한국교회에 나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매 집회에 주님의 권능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 임했습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의 죄 사함이나 아직 회심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 가운데 탄식하며 집에서 온 밤을 지새웠습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기도합니다. 교회는 참으로 많은 악기에서 나는 화음 보다 더 조화를 이루는 수백 명의 기도 소리의 중얼거림으로 가득 찼습니다.”


불이란 외침에 아수라장이 된 집회장소

성령의 역사는 교파를 초월하여 평양 시내 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도 발생했다. 수백 명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던 평양의 어느 감리교회에서 한 불신자가 난입하여 갑자기 “불이요 불”이라고 외친 것이다. 여자석 뒷편에 주로 앉아 있던, 집회에 처음으로 초대받은 불신여성들이 동요되면서 실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들이 동요하여 한꺼번에 문쪽으로 몰려가면서 현관문짝이 부서져 내렸고, 사람들은 소리 지르고 절규했습니다.”


무어와 노블을 비롯한 문제의 현장에 있던 “그들은 마치 우리 안에 있는 분노한 수많은 야수들과 흡사했다”고 증언했다.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다쳤으나 다행히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몇몇의 유아들이 거의 죽을 뻔 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극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거친 신발을 신은 미국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그같은 사태가 발생했다면 분명히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마귀가 교회에 침입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들이 불신자들 가운데 나돌기 시작했다.

그 사건이 발생한 이틀 날 저녁 집회에는 많은 여자들이 참석하지 못했으나 선교사들은 그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었다. 한국인 강사가 마무리 기도에서 그 장면을 심판 날에 비견하여 “그날에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무시무시한 화가 있을 것이다!”고 외쳤던 것은 너무도 시의 적절했다. 이날 있었던 거짓말 같은 난동사건은 현장을 직접 목격한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무어와 노블이 매큔을 비롯한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알려주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숭실대학에 번진 성령의 역사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의 주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증언대로 영적대각성운동에 가장 민감한 이들은 역시 젊은이들이었다. 이것은 평양대부흥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미션스쿨학생들이 큰 은혜를 경험하더니 곧 숭실대학 학생들이 그 같은 역사를 체험한 것이다. 숭실대학의 북감리교 선교사 베커가 증언한대로 “수업중에 가진 그 기도회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여 그 교실을 통회의 외침과 흐느낌으로 가득 차 그것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죄의식으로 압도되고 전율할때까지 계속되었다.” 불레어 선교사의 말대로 “심지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울면서 그들의 잘못을 서로 나누느라 수업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개학 후 2주간 성령의 역사가 숭실 학생 가운데 강하게 임한 것이다.

 

“그 후 2주간은 누시무시하고 놀라웠다. 예비시험 때가 되자 오후 네 시에는 어떤 지도자도 없이 자율적으로 학생집회를 갖기로 정해졌다. 그러나 우리의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께서 능력과 권능으로 그곳에 계셨으며, 그의 임재의 현시는 무시무시했다. 마치 사람이 하나님의 헌신 속에 발가벗겨져 죄의 무시무시함을 발견하듯이 이들은 행동했다. 먼저 육체적으로 비통해하며 손과 머리로 바닥을 치며 통회하였고, 마치 군대 마귀가 그를 찢듯이 울부짖으며 부르짖었고, 이어 죄악 되고 정결치 못한 삶에 대한 뉘우침으로 흐느껴 울며 회개했다.”

 

평양장대현교회에 임했던 놀라운 회개의 영이 숭실대학에 임한 것이다. 학생들은 온갖 죄악을 타 토해내었다. 은밀한 죄악들이 적나라하게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학생들 가운데 일어난 이와 같은 놀라운 부흥운동 이후 학생들의 생활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묵도할 수 있었다. 첫째 학생들의 수업태도와 경건생활이 달라졌고, 중보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또한 복음전도에 뛰어들었다. 부흥운동이 학교생활에 미친 결과는 즉각적이고 급진적이었다. 개인적인 경건은 모든 학생들에 의해 밤과 아침에 충실하게 수행되었고, 반면 전 학생의 3분의 2의 학생들이 학교의 방과후 매일 기도실에서 기도했다.

 

평양신학교에도 강한 성령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1907년 북장로교 선교회 평양선교부가 보고한 대로 4월 한국 전역에서 교회의 사역을 비우고 온 신학교 학생들이 학기가 개강하는 주간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4월 6일 토요일 밤과 4월 8일 월요일, 그리고 4월 9일 화요일에 또 다시 성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이처럼 1907년 겨울 남자사경회에서 발흥한 평양의 성령의 역사는 평양전역으로 확산되어 평양 시내 남자 여자 어른들을 물론 보통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한 때 “한국에서 가장 희망 없는 지역”으로 알려진 평양이 기도와 찬송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뀐 것이다.

 

1907년 1월 14일과 15일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은 평양을 넘어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현장에 있었던 번하이젤이 3월 7일자 일기에서 증언한대로 참석자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 받은 은혜를 시골 전역에 전하여 같은 광경들이 반복되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의 불길이 평양에서 평양인근 지역으로 확대되었음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2월 첫 주에 스왈른 씨가 나와 동행하여 자산에 갔다. 그곳에서 한 주간 동안 성경학교를 열고 비슷한 광경들을 목격했다. 그 때 이후로 도시 사람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겨울학교를 열었다. 새 신자 수백명이 교회로 인도되었다. 2월 26일 이씨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러 황주에 갔다. 훌륭한 수업이었고 성령이 지배하심이 분명했다.”


번하이젤이 3월 15일자 일기에서 평양 근처 덕천읍 교회에서도 “평양에서처럼 성령의 큰 역사가 증명되었다”고 언급한 것처럼 평양대부흥운동의 불길은 2월과 3월에 접어들면서 요원의 불길처럼 더욱 확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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