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교수의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 대부흥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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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교수의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 대부흥 이야기(2)
  • 송영락
  • 승인 2007.05.1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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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기름부음 없이 대부흥은 일어나지 않는다"

1903년 8월 원산에 놀라운 부흥운동이 발흥했다. 원산부흥운동의 모제는 무명의 여선교사들이었다.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 하디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이 부흥운동의 모체인 기도의 불씨를 놓은 사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남감리교 여선교사 화이트와 캐나다 장로교 여선교사 매컬리 두 명의 여자 선교사였다. 화이트선교사는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사건 때문에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온 사람이었고 매컬리선교사는 캐나다 출신 장로교 선교사로 원산에 거점을 삼고 있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이 모여서 한국교회 가운데 그리고 선교사들 가운데 영적인 각성운동이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기도모임이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을 맞았을 때 하디가 “1903년 조선교회 부흥의 불길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두 여선교사가 연합하여 기도하는 중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 그 기도모임이었다. 스톡스가 증언하는 것처럼 “만약 하디의 리더십 능력을 인정하고 그가 요구하는 성령의 권능을 수납한 두 명의 헌신적인 여자선교사들의 진지한 기도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대부흥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여인의 기도의 ‘십자군’은 하디에게 알려지지 않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하디가 얼마 후 알게 되었다. 북장로교 선교사 해리로즈 역시 한국북장로교선교사에서 이 두 명의 여자선교사들의 기도에서 한국부흥운동이 시작되었음을 확인했다. 두 사람이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기도의 소문이 주변에 알려졌다. 기도모임은 그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한사람, 한사람 합류하면서 원산 지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이 함께 기도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화이트와 매컬리 이 두 사람이 시작한 기도모임이 선교사들이 합류하는 기도모임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디는 자신이 인도하는 집회를 통해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이 큰 은혜를 경험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새로운 소명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이 민족 가운데 영적각성운동을 위해 자기를 도구로 부르셨다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1904년 2월에 그에게 실패감을 안겨주었던 강원도 금화군 지경대로 향했다. 강원도 지경대로 향하던 하디는 그곳 가까이 새술막에 하루를 묵으면서 “하나님이여 원산에서 베푸셨던 똑같은 은혜를 이곳에서도 베풀어 주시옵소서”라며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했다. 강원도 지경대에서 집회 동안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얼마나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으면 집회에 대한 기억이 “우리가 살아 있는 일생동안 우릴르 떠나지 않을 것이다”고 했을까 상상이 간다. 그만큼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음을 말해준다. 원산에서 일어났던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자기에게 실패감을 안겨주었던 강원도 금화군 지경대에서도 똑같이 일어난 것이다.

 

하디는 지경대에서 다시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식 후 건강을 회복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 대로 이끌려간 것이다. 하디는 성령의 손에 이끌려 송도의 남감리교 집회, 서울에서의 집회를 계속해서 인도한다. 똑같은 성령의 역사가 그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하디를 통해 부흥운동이 서서히 확대되어 1904년 6월 들어 비로소 ‘부흥회’라는 말이 한국에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부흥회하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하나는 이미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신앙을 갱신하거나 신앙을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자들이 이 기회를 통해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부흥회는 그런 면에서 기성 신자들이나 처음 교회에 찾아온 초신자들 모두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수단이었다.

 

하디의 부흥회가 계속되면서 부흥운동이 저변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안식년을 계획하고 있던 하디는 안식년을 떠나기 전 서울, 평양, 제물포 세 군데서 집회를 계획했다. 이들 집회 때 여러 사람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1년 동안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았던 하디가 안식년을 계획한 것은 무리한 집회일정으로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령충만 한 가운데 집회를 인도하고, 집회를 통해 성령의 은혜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몸이 그만큼 쇠잔해진 것이다.

 

하디는 안식년을 떠나기 전 원산부흥운동의 불길이 계속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0월에 서울과 평양과 제물포에서 열리는 집회를 인도했다. 세 군데서 똑같은 놀라운 회개의 역사,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났다. 1904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정동감리교회에서 열린 하디의 남녀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1904년 10월 16일부터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모인 가운데 열린 하디의 평양부흥회 때에 주께서 권능 가운데 그들과 함께했다. 심령을 사로잡는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나타난 것이다. 한 선교사는 이 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강하게 회개하는 백성들을 본국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철저한 회개의 역사는 이어 열린 하디의 제물포 부흥회에서도 그래도 재현되었다. 그 현장에 있던 케이블선교사가 코리아 메쏘디스트에 “또 다른 놀라운 부흥”이라는 글에서 “나는 결코 전에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 그와 같은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증언할 만큼 성령의 역사는 강력했다. 하디가 인도한 서울과 평양과 제물포 집회 모두에 회개의 영이 임한 것이다.

 

1904년 11월 예정대로 하디는 안식년을 떠났다. 그가 안식년을 떠난 후에도 1905년 신년들이 성령의 역사가 남감리교 선교구 개성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같은 역사가 1905년 하디가 없는 가운데서도 한국교회에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그해 가을 복음주의선교연합공의회를 결성하고, 그 자리에 모여 신년부흥회를 전국적으로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현장에 참석했던 찰스 번하이젤선교사가 그 다음날 자신의 일기에서 기술한 것처럼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운동"이었다.

 

부흥운동의 움직임을 목도하면서 선교사들은 영적각성운동이 이 민족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확신했다. 부흥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기 위해 1906년 1월 신년부흥회를 전국적으로 갖기로 결정한 것이다. 장감연합공회 결성 때 참여한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일차적으로 추진할 것이 불신자들을 전도해 교회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는 기성신자들이 성령의 충만, 영적각성을 경험하는 것임을 간파하고 이 일에 초점을 둔 것이다.


“부흥집회 첫 번째 목적은 새로운 신자의 등록보다 교회 내의 영적각성이어야 한다. 사역이 먼저 깊이가 있으면 그 다음에 자연히 넓이는 따라 올 것이다.” 새신자전도에 앞서 기성신자들이 먼저 영적으로 각성하는 일이 선행될 때 한국교회가 참된 부흥을 경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성신자들이 먼저 은혜를 받아서 전도가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진단이었다.
 

교회는 전도를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전도 못지않게 우선되어야 할 것이 기성신자들이 먼저 영적인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기존신자가 먼저 성령의 기름부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도는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일차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영적으로 깨어야 된다. 기성신자들과 교역자들이 먼저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영적으로 깨어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부흥운동의 발흥과 확산 과정에서 은혜를 받은 지도자를 도구로 사용했다.


미국의 일차 대각성운동, 이차 대각성운동, 무디 부흥운동도 다 마찬가지로 교회 지도자들, 신학생, 목회자들이 먼저 깨어났다. 웨일즈 부흥운동 때 신학생이었던 이반 로버츠가 먼저 은혜를 경험했고, 원산부흥운동에서는 하디가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 때는 이길함선교사와 길선주장로가 은혜를 경험했다. 교역자들과 평신도지도자들이 먼저 큰 은혜를 받았고 이들을 통해 부흥운동이 저변 확대되면서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지도자들이 깨어나 복음을 전할 때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기성교회 신자들이 먼저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한다는 1905년 가을 복음주의연합공의회의 결정은 돌이켜 볼 때 적절한 결정이었다. 더구나 이 시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주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주권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적 위기를 비분으로 쓸어안아야 했고, 선교사들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야 했다.

 

블레어가 중언한대로 “많은 한국인들은 교회를 한국의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다.” 이 시대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은 이 민족에게 가장 적실하게 요청되는 것이 영적대각성운동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교회는 놀랍게도 성경을 가르쳤고, 이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기도한대로 1906년 신년부흥회 때 놀라운 영적인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1906년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신년부흥회가 열리기 직전 1905년 12월에 하디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나님께서 또 하디를 예비해 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릭워렌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목적을 이R는 삶을 살면 주변 환경에도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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