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빈의 평신도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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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의 평신도 목회
  • 승인 2001.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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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필요에 관심을 갖는 것”

교단이란 것은 이 사람에게 별 차이를 주지 못했다-위치도 아니었고 크기도 아니었다. 설교와 음악, 중요하긴 하지만, 그 리스트에 첫 번째는 아니었다. 몇 주동안 예배가 끝난 직후, 그는 붐비는 군중의 가장자리에 서서 사람들이 서로서로 관련하는 방법들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그는 그의 이전교회에서 실망하였다. 관계성들은 피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정중하고 공손하기는 했다. 그들은 서로 만나 인사하면서 미소짓고 고개도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은 뭔가 다른 일들로 서두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생각하기를 사람들은 돌보는구나, 그러나 볼 일이 끝났을 때(chips were down)는 아무도 그를 위해 거기에 있지 않다. 아무도 정말로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this) 교회 안에서 그는 다른 문화를 느꼈다. 사람들은 실제적이었다. 얘기하는데에 그들이 시간을 들인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들의 미소들과 제스츄어들은 결속된 관계성들을 표시해 주었다. 몇 주일 후에, 그는 만약 그가 받아들여 질 수 있을 것인지를 보기 위해 가장자리로

부터 내적으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사람들도 그와 함께 얘기했다. 그들은 그에 대해 그들의 작은 모임 안에 있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가 방문자였다고 발견되자 한사람이 그에게 와서 커피를 하자고 하고 그 다음에 정보센터로 갔다.

이제 그가 ‘안에’있는 것으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것인가? 이 교회의 문화의 힘(운동량)이 그가 회원 속으로 들어갔듯이 그를 목회하도록(doing a ministry) 할 것인가? 그 과정을 통해서 그를 데리고 커피테이블로 간 사람과 같이 당신의 목회를 발견할 길들은 있는가? 사랑과 돌봄으로서 교회의 문화의 특성으로 평신도목회가 경험되어지는가? 교회는 사랑과 받아들임에 대한 그의 느껴진 필요들에 응답하였다. 그러나 만약 교회가 그것이 그렇게 되도록 부르신 모든 것이 되도록 하려면 그것은 또한 그 사람들의 느껴지지 않은 필요들에 응답할 것이다.

어린이들의 느껴지지 않은 필요들이 이것을 예증해 준다. TV토크쇼에서 인터뷰한 어린이 심리학자는 어린이는 그들의 부모가 그들과 함께 충분한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그들의 부모에게 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행동징후들에 대하여 예민한(alert) 부모들은 그것이 바로 그들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pastoral care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들을 홀로 가지고 고민하고 씨름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pastoral care를 필요로 하는 데에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더 개인적인 관심을 요구하려고 목사에게 올 사람은 별로 없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날(a new day) 이다. 교회는 뭔가 “해야한다(doing)”라는 전통적인 방법에 매달려있는 지도자들은 고민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mode)안에 있다. 1996년의 전반부를 통하여 시행된 6개월간의 연구에서 교인들은 단지 기관유지(institutional maintance)로 정신이 팔려있는 듯이 보이는 옛날방식에 그들 자신이 고착되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알반연구소(Alban Institute)의 지각이 있는 창시자 로레메드(Loren Mead)는, 교회는 “다시 정비되어야(reinvent)” 한다고 강하게 믿고 있다. 필요한 변화들은 너무 중요한데 회중들을 더 강하게 다루거나 그들을 약간 더 손질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들을 “다시 재정비(reinvent)”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들은 다음 세대에 단지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목회(pastoral)”하는 사람들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목회(pastoral)를 정의한다.

서병채목사<한국LPM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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