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기획-“색다른 가정, 색다른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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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기획-“색다른 가정, 색다른 행복”
  • 현승미
  • 승인 2007.05.09 1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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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 성경지식은 얕지만,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요”

80:1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사람, 탈북자  박미혜성도 가정


해마다 이혼과 가정불화로 인한 범죄가 증가하는 가운데 올해도 어김없이 5월 가정의 달을 맞았다. 여전히 어린이날, 어버이날은 존재하지만 그 의미가 퇴색되어버린지 오래다. 이제는 전통적인 가정문화에서 한 걸음 나와서 입양이나 혹은 각자의 필요에 의한 서로 다른 가정이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다문화 가정, 한부모 가정이 증가하고 있는 이 때에 이들을 편견이 아닌 눈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의 전환이 절실한 때다. 이에 4회에 걸쳐 이들 가정의 사례를 소개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의 노하우를 배워본다.   <편집자주>


“아직 이북에 가족들이 남아 있어요. 그간 많은 곳에서 취재 요청이 있었지만, 그 가족들이 위험해질까봐 앞에 나설 수 없었어요. 모두 거절했지요. 그런데, 기독교 신문사라니까.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많으니까. 용기를 내서 만나보자 한 것이지요.”


을지로 3가 지하철 역사 안. 하루에도 몇 백 명씩 오고가는 그 곳 한가운데 놓여진 신문 가판대. 신문이며 잡지 간단한 간식류까지 가득차 한 두 사람 들어가 앉기에도 빠듯한 그 곳에서 일주일 중 6일을 보내는 박미혜 성도(영락교회).


그는 5년 전 아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고 3년 뒤 딸아이까지 다시 품 안에 안을 수 있게 됐다.


“아이들과 탈북해 오는 과정에서도, 지금 현재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 하루하루가 목숨을 내걸고 벌이는 사투였지요.”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된 건 중국에서였다. 탈북 후 마음을 졸이며 체류한 열흘.


“중국에 있는 동안 교회 집사님 댁에서 신세를 져야 했으니까 알아듣는 척 ‘네’, ‘네’ 대답은 했지만, 제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캄보디아로 옮겨가서 또 체류해야만 했는데,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당시 영락교회에서 선교를 나온 두 명의 집사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국내에 입국해 하나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신앙생활은 이어졌다. 그러나 사람의 필요에 의해 가진 믿음은 쉽게 흔들리기 마련.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현실사회에 나오면서 그는 하나님을 멀리했다.


“특별히 싫거나 해서 그런건 아니었고,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더군다나 조선족이나 탈북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은 한정돼 있습니다. 주일성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캄보디아에서 만났던 영락교회 집사님 두 분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 때 다시 신앙을 회복했고, 그 후론 절대 신앙을 놓지 않았죠.”


국내에 들어온지 5년째. 그동안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나 몸은 고단했지만, 그는 행복할 수 있었다. 힘든 가운데에서도 주일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교회에 출석했다.


“성경에 대해 잘 모를 때도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어요. 마음이 기쁜데 어찌 하나님을 붙잡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런 박미혜 성도의 신앙심은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홀로 아이 둘을 키워낸다는 것 자체가 버거운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 그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열다섯, 열 둘,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어른이 돼 있었다.


매일 아침 기도로 시작


“하루 종일 일하느라 밖에 나와 있어야 하니까 아이들에게 그게 가장 미안하지요. 이번 어린이날에도 출근하느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엄마가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매일 즐거움으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친 것 같아요.”


온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진 못하지만, 그는 아침일과만은 무조건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록 성경지식은 부족할지라도 매일 기도로 시작하고, 식사기도, 감사기도 등 틈나는 대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딸아이도 탈북 과정에서 6일정도 중국에 체류했다. 그 기간 중 주일이 있어 단 한번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시간을 접했을 뿐인데, 오히려 자신보다 더 열심히 간구하고 기도하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딸아이의 기도하는 모습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사관 직원들이 놀랄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공안들의 눈을 가려주셨지요. 그때 직접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덕분인지 딸아이의 신앙심이 아주 깊답니다.”


그는 아이들의 신앙 관리만큼이나 여느 엄마들처럼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혼자 벌어서 아이들의 교육과 생활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결코 넉넉할 수 없는 집안 살림이기에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일성수 할 수 있어 행복해


일찍이 기술을 배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리지 않고 일 했고, 나중에는 본격적으로 식당에서 일하며 음식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다행히 남들보다 더 빨리 기술을 습득했고, 열심히 일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주일마다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스트레스.


“대부분의 식당들이 주일날 쉬지 않잖아요. 오히려 더 바쁘고 장사가 잘 되기 때문에 예배시간만 빼달라고 이야기하기도 눈치가 보였죠. 그러니 주일마다 눈치 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길거리 좌판이라도 좋으니 주일성수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 했지요.”


그렇게 우연히 역사 내 신문가판대 일을 알게 됐고, 필요한 서류를 작성 한 후 기도로 매달렸다. 전자추첨. 경쟁률은 80:1.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믿음 밖에 없었던 그에게 하나님은 기적을 보여주셨다. 그것도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당첨됐다는 연락이 왔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택받은 것도 기뻤지만, 이제 더 이상 주일에 눈치 보지 않고 교회 나갈 수 있는 것에 한없는 감사와 기쁨을 느꼈다. 기지개 한번 크게 켤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밤늦게까지 있어야 하고, 길을 묻거나 때론 술 취한 사람들도 상대해야 하지만 그런 것쯤 아무 문제 될 게 없었다.


기적을 보여주신 하나님


“아무도 의지할 사람 없는 이 땅에서 저에게 형제자매가 찾아오게 하시고, 한없는 복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덕분에 믿지 않는 탈북자들을 전도하게 됐어요. 그냥 제가 체험한 이야기를 해 주는게 전부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 보면서 감동을 받고 그들의 닫힌 마음도 움직이더라구요.”


최근 국내 정착을 잘한 사례로 선정되기도 한 박미혜 성도지만, 여전히 탈북자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에는 상처를 받게 된다고 고백했다.


“대부분이 탈북자들에게 무조건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는데, 제가 다니는 영락교회도 그렇지만 큰 교회에는 회사 사장님도 계시고, 임원도 계시고 도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편견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조차 많지 않은 실정에서 우리 교회가 교인 한 사람이 탈북자 한 사람을 책임지고 일자리를 알선하거나 제공해준다면 그보다 더 사랑과 관심이 어디 있겠어요.


고향이 부산인 시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대신해 언젠가는 꼭 한국에 오겠다고 다짐했던 그의 남편. 12년 전 사고로 사망했지만, 그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북한에서의 편한 삶도 마다하고 목숨을 건 탈북을 시도했던 박미혜 성도. 가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넘어 자신과 같은 탈북자는 물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그를 통해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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