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능력 회복한 한국교회가 사회와 단절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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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능력 회복한 한국교회가 사회와 단절 해결한다
  • 송영락
  • 승인 2007.03.1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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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단절을 선언한 한국교회 실상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한국교회. 교회 안에서만 거룩하고 밖에서는 무기력한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처참하기 그지없다. 부흥사로 알려진 장경동목사(대전중문교회)는 기독교방송에 출연하여 교회 벽을 넘어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꼬집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또 한국교회 전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면 이런 지적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니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접어두고 ‘이 땅의 교회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어떤 평가를 가지고 계실까?’를 자문해 보면 문제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됐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 아쉬운 것은 교회가 스스로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지적과 비판에 오늘날 교회는 심각한 패배주의에 멍들고 있다. ‘우리는 안된다’, ‘교회는 다음 세대까지 이어가지 못한다’라는 패배주의가 교회마다 성도들의 뼛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단절을 선택한 교회

이런 정서는 한국교회의 존재가치를 흔들고 있다. 흔들리는 존재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사회와 높은 담을 쌓기 시작했다. 단절을 선택한 쪽은 사회가 아니라 교회였다. 교회는 잘못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사회와 단절을 선택했다.

 

그런데 요즘 교회의 모습은 이런 현상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역이라는 방패 속에서 더욱 은밀하게 온갖 불의를 자행하고 있다. 사회 질타의 도마 위에 올라 있는 교권쟁탈, 무분별한 권위와 남용, 물량위주의 기업식 교회 운영 등으로 집약되는 타락의 목록들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문제해결을 위한 더욱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사실 교회는 그 자체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의 타락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우리 사회와 국가의 모든 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그냥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안이다.

 

교회는 사회를 선도하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공동체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습과는 반드시 다른 모습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 교회이다. 교회의 모습은 사회생활의 모범답안이어야만 하며, 사회로부터 추종하고픈 열망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신뢰를 잃고 있는 한국교회

오래된 통계이기는 하지만 198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성장율도 1.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970만명 기독교인중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수는 57% 정도이며, 교회를 다니다가도 그만두는 종교이탈율도 한국 종교 중 가장 높은 67%로 나타났다. 일반 사회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기독교, 천주교, 불교에 대한 선호도는 각각 22%, 40%, 37%로 나타나서, 기독교 지도자의 자질과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 신뢰도가 가장 낮게 나타났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내부와 외부에서 양면적 공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부흥은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 사회적으로 어두운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희망이 없고 절망뿐인 현실 가운데 부흥의 불씨는 자라난다.

 

부흥의 시기 교회는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비록 사회의 환경은 어두웠지만 그 가운데 교회는 빛의 역할을 감당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보고 교회의 존재와 영향력을 인정했다.


사회와 함께 고통을 나눈 초기 한국교회

초기 한국 교회 선교사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의 집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보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반드시 주일마다 대문에다 태극기를 달았기 때문이다. 성탄절에는 복음을 상징하는 십자가와 십자등, 그리고 나라사랑을 표현하는 태극기와 태극등을 함께 달았다고 한다. 이덕주교수(감신대)의 ‘한국교회 처음이야기’에 따르면, 이런 복음에 대한 신실성과 나라사랑에 대한 자긍심이 3·1운동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천도교 지도자들과 논의해서 민족적 거사로 발전시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점인지도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특히 3·1운동과 한국 교회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 국민의 1~2%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일제에 의해 체포된 기독교인은 전체 체포자의 17.6%나 되었다고 확인해 주고 있다. 당시의 기록들에는 일경들이 길거리에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아 기독교인인지 여부를 묻고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잡아가고, 비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놓아주었다고 한다. 1919년 3월부터 5월 30일까지 파손된 교회가 47개, 장로교인만 체포된 성도들이 3,804명, 이 가운데 체포된 목회자와 장로는 134명, 교회지도자는 202명, 남자 2,125명, 여자 531명, 사살된 자 41명, 매맞다 죽은 자 6명… 교회는 스스로 고통을 당했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당시에 고통당하는 자들의 피난처와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 주었던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영적권위 회복을 향해

교회가 사회와 쌓은 담을 헐기 위해서는 교회 스스로 영적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영적권위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성장을 꿈꾸는 기업들에게 있어서 ‘투명성’을 통한 신뢰성의 확보라는 것이 기업경영 가운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책이 나와 있어 눈여겨볼만 하다. ‘투명경영’이라는 제목으로 최근에 출간된 이 책 속에서 저자들(Don Tapscott과 David Ticoll)은 투명경영이 전 세계 기업을 어떻게 작동하고, 기업의 수익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과학적으로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소수의 시장지배자들이 모든 것을 독점하던 산업자본주의의 역사를 거쳐 이제는 기업의 주주는 물론이고 고객과 지역주민들에게까지 모든 소식들이 순간적으로 퍼지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혁명 시대에, 투명성을 확보하여 소비자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 책이 함의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자면 기업들이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계속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투명성’을 통한 신뢰성의 확보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투명성’이나 투명성을 통한 신뢰성의 확보는 기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 더욱 도드라지게 강조되어야 할 항목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 전체적으로나 특별히 어느 교단 내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들은 투명성이라든가 투명성을 통한 신뢰성의 확보라든가 하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같은 비전을 가지고 동역하는 사람들조차 서로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일들이 교단 내에서 혹은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일어나고, 또 그것이 쟁점이 되어 엉뚱하게 시간과 힘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상황 앞에서 ‘세상 사람들이 과연 한국교회를 신뢰할만한 공동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령운동은 교회의 벽을 넘는다 

마틴 로이드존스에 따르면 부흥에는 보편적인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의식, 자기가 죄인이라는 의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놀랍다는 의식, 다른 사람들도 그 구원 알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등이 부흥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즉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 부흥을 통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부흥의 특징이다. 나이나 기질이나 또는 이지적인 다양성 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부흥을 통해서 감화를 받는다.

 

부흥이란 어떤 특별한 유의 사람들, 소위 종교적인 유형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흥의 역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일 가운데 하나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유형의 사람들, 계층이나 나이나 기질이나 다른 모든 것을 기준으로 나누어져 있는 사회의 모든 부류에 소속한 사람들이 부흥시에 함께 어우러진다는 사실이다.

 

교회와 사회가 단절된 벽을 허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신뢰성, 투명성도 중요하지만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일어날 때 가능하다. 재를 쓰고 무릎을 꿇고 회개할 때 이런 부흥의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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