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화되는 복음의 절대성을 뛰어 넘어라”
성경은 인류의 생존여부가 구원자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따라 결정될 문제라고 밝힌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복을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란 매우 간단한 명제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원’이라는 단어로 함축한다면, 모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때로는 복을, 때로는 심판을 교차시켜 운행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같은 구원방식을 확인하는 매우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따라서 성경은 ‘인류구원의 언약’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사 가운데 일어나는 우리들의 편의주의 발상들이 그것이다. 절대성이 사라지고 상대성이 우위를 차지하는 현대사조의 현란함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사를 ‘맞춤식 복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모 방송사가 ‘가정의 종교갈등’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방영한 일이 있다.
이 방송은 한 가정에서 다른 종교를 믿는 경우 불화가 적지 않은 것과 심지어 더 이상의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없어 이혼을 결정한 사례들을 묶어 “과연 종교가 다른 가족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없는 것일까”시청자들에게 되물었다.
유감스런 일은, 총5개의 사례 가운데 유독 기독교 관련 사례가 3개를 차지해 기독교 신앙이 불화를 일으키는 종교로 인식하도록 했다. 제작진의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기독교에 대한 공격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부분들이 적지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여하튼 이 프로그램은 가정이 먼저인지 아니면 종교가 먼저인지 취사선택하도록 묵시적 강요를 재차 반복했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무리 가족구성원이라고 하더라도 상호 양해하고 배려하여 종교를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라며 이 프로그램을 마무리했다.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이 프로그램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지만 이 방송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가 여러 다른 종교들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프로그램 진행자는 ‘서로 인정하고 배려하여’라고 말한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가정을 지켜야 하고 우리 사회가 종교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거나 해체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만약 이런 일이 예상된다면 교회가 나서서 막아야 할 책임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현대의 한 복판에 있는 21세기 한국사회가 이렇게 상대성의 원리를 추종하면서 창조주로서 인정하는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상대성의 원리로 바라보길 당연시하는 풍토를 매우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우리는 매우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상대화 사회에서 절대성을 주장하는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에는 우리들이 경험하는 현실과 매우 흡사한 상황들이 즐비하다. 물론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지만 인류가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부분들은 대동소이한 것 같다.
우리는 신약성경 가운데 항구도시로서 여러 민족의 문물이 모이고 문화가 섞여 거대한 도시문화를 꽃 피운 고린도지역을 떠올리게 된다.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낸 이방 종교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성장과 발전을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현란한 신상들과 성직자들의 화려한 제복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당시 고린도 지역의 문화적 우수성을 자랑하곤 했을 것이다. 바울은 이 지역사람들이 “종교성이 많다”며 우상문화를 한탄했었다. 다양한 문화와 서로 다른 종교들, 그리고 자신의 종교적 특징을 표현하는 우상물들. 그리고 이것들이 침해받으면 않 된다는 자연발생적 보호본능까지 겹쳐 지금으로부터 2000년 가까이 되는 고대시대가 오늘 날 한국사회의 모습에 비교될 법 하다.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며 외견상 아름다운 조각물들이 즐비했을 고린도지역은 오히려 복음이 들어가기 적합한 환경이었다. 기독교 역시 여러 다른 종교들 중 하나로 취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변적 철학이 발달된 이 지역 속에서 또 자극적인 문화체험을 즐겼던 사람들 속에서 기독교는 그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즐겁게 해 주는 ‘도우미’외에 다른 기능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의교회를 우리나라 굴지의 대형교회로 성장시키고 원로목사로 일선에서 후퇴한 옥한흠목사도 최근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의미있는 말을 했다.
“한국교회가 성장한 것에 대해 이견은 없습니다. 분명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즈음에 우리는 왜 우리나라 교회가 성장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한가지 간과해서는 않될 부분이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경우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었기 때문에 성장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그들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킴으로써 대형교회가 가능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갱신돼야 할 부분입니다.”
옥목사의 우려대로 현대교회는 최근 심각한 왜곡현상을 빚고 있다. 세상의 한 기관으로서 해야할 역할이 규정돼 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도 직업인들처럼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든지, 교회직원들의 이익단체인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든지 하여 교회가 성역화 되는 것을 철저하게 가로막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교회가 교회로서 반드시 했어야 할 역할을 외면한 결과 빚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확장시키는 일보다 개교회 성장을 앞세움으로써 대사회적으로는 이익단체로 비춰져 최근과 같은 굴절현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서울 강동구의 한 대형교회의 경우는 연간 예산이 600~700억 원 규모로 책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서울 강남의 모 교회도 400억 원을 상회하는 예산을 잡은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할 문제는 이들 교회들이 지출하는 예산 가운데 사회복지 분야로 지출되는 것이 교회유지비 및 감가상각비, 직원급여 등 대형교회 유지비용으로 지출되는 것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는데 있다. 이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교회를 종교단체라기 보다 이익단체로 비춰질 상당한 근거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들 교회가 지출하는 대사회 구제비용은, 절대액수로는 엄청난 금액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보수적인 한국교회 대부분이 사회적 소수 기득권층을 옹호하고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보수적인 교회는 변화에 둔감하고 변화를 싫어하기까지 한다. 사회적 기득권층 역시 변화를 싫어하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기득권층과 교회를 동일시하는 사회적 여론은 교회를 종교단체로 보기보다는 이익단체로 보려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현재 한국기독교는 절대진리를 전달하는 기관으로서 보호받아야할 장소가 아니라, 여러 종교단체들 가운데 하나로 다른 종교들과 섞여서 포교활동을 해야만 하는 규제를 받게 됐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형태인 다원주의 사상이 우리나라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절대진리가 아니라 상대적 진리, 그것도 사람들에게 효용성의 가치를 인정받는 범위 안에서만 포교활동을 인정받게 되는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믿음을 가지면 행복을 느낀다.” “신앙생활을 하면 가정이 화목해진다.” 이런 구호들은 사실 효용성의 가치에 무게를 둔 신종 전도법이다. 무기력한 현대인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인데, 다분히 인본주의적 접근법인 것이다.
우리나라 주선후기 정약용 선생이 주도했던 실학파 가운데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연상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미국의 경우는 실용주의라고 해서 프래그머티즘이 이것에 해당될 것이다. 삶에 효과가 있어야 진리라는 개념이다.
성장과 부흥이 인기단어로 떠오르는 최근의 상황은, 기독교인 감소 통계라는 충격의 반작용으로 성장운동이 각광을 받고 있다. 개척교회운동과 미자립교회 지원운동이 갑자기 쏟아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교회예산 1/10 사회환원운동’이 조심스럽게 준비 중이란 소식이다.
예산이 600억 원이라면 1/10은 60억원이다. 한국교회 전체가 뭉치면 엄청난 금액이다. 힘든 일이지만 갱신과 부흥을 한번에 경험하려면 사회에 내놓아야 한다. 그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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