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의 믿음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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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의 믿음으로 삽니다
  • 김찬현
  • 승인 2007.01.3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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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대륙 중국을 가슴에 품고 선교하는 명성선교회 회장 박종보장로

▲ 자신이 사역하고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박종보장로

선교를 위해 중국 땅을 밟은 것은 아니었다. 무한한 가능성의 땅 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교육받지 못하고 하루에도 수 십 시간의 미싱질을 해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준 기쁜 복음을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 그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택했다. 70대의 나이에도 중국선교에 대한 젊은 청년의 그것보다도 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명성선교회 박종보장로의 이야기다.

 

선교에 헌신했다고 하면 흔히 20, 30대 아니면 40대의 젊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작고 마른 몸에 카랑카랑한 목소리, 약간의 사투리가 묻어나는 모습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할아버지의 그것이다. 그러나 올해 72세인 박종보장로의 눈빛은 그 어떤 청년들보다도 생기가 넘쳐흘러 보인다.


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 중국. 수많은 사람들만큼 무수한 기회들이 존재하는 곳. 그 곳에서 작고 야윈 노인의 가슴 속에는 드넓은 중국대륙을 향한 큰 꿈이 느껴진다.

“2000년도에 처음 중국갔을 땐 선교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 공장을 세우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중국에 가서 보니 돈은 안보이고 사람이 보이더라구”라고 말하는 박장로. 박장로가 처음 중국에 건너가게 된 것은 1988년 그의 앞으로 전해진 편지한통 때문이었다. 일제시대 중국으로 갔던 가족들이 중국 흑룡강성에서 박장로 앞으로 보낸 편지였다. 이 편지를 시작으로 그는 중국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왕래하기 시작했고, 지난 2000년부터 중국의 가족들과 함께 노트북가방을 만드는 공장을 지었다.

“공장을 설립하면서 중국현지의 공장운영에 대해서는 중국에 있는 가족들이 전부 맡아서 운영하고 나는 대외적인 일을 맡았었지. 공장에서 일하던 아이들이 처음에는 250명 정도로 그중에 조선족은 20%정도였어. 공장에 들러보면 그 더운 여름날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더라고. 여름이 무척 더우니까 일하다가 졸기도 하고 그러면 미싱기계에 손을 다치기도 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딸같은 마음이 들어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복음도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더라고. 그래서 이 아이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거지”

그래서 시작하게 된 것이 한글교실이었다. 공장건물의 반을 뚝잘라 600평 규모의 교실을 만들고 한글성경을 가지고 우리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보통 공장에서 3~4년 경력을 가진 직원들이 많이 받으면 우리 돈으로 30만원 정도 받아. 그런데 중국에 들어온 우리나라 기업들이 우리말을 잘하는 중국 사람들에게는 50만원 정도 주더라고. 우리말 잘 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두 배정도 돈을 더 받으니 관심을 받을 수 밖에. 밤이면 길 건너에 있던 공장에서도 담을 넘어서 한글 공부하러 왔었어.”

박장로의 말처럼 공장의 하루일과가 끝나고 8시부터 시작되는 한글교실은 몇 달지나지않아 사람들로 꽉꽉 채워졌다.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는 한국에서 자원봉사를 온 대학생들로 채웠고 한국에서 후원을 받아 중고컴퓨터를 들여와 컴퓨터교육도 시작했다.

“컴퓨터교실을 열기 위해 한국에서 중고컴퓨터 15대를 후원받아서 중국 공장으로 보냈는데세관에서 계속 거부하는거야. 그래도 계속 보냈지. 결국 3번만에 컴퓨터 15대를 다 중국공장에 들여올 수 있었어.”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컴퓨터교실은 8개월이 지나자 다들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를 수 있게됐고, 이런 박장로의 노력이 전해져 공장이 있는 청도 교남시정부에서도 그의 노력에 감사하는 의미의 표창장이 주어졌다.

중국에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노력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환율이 가장 높았던 시절 공장에 5만달러나 투자했지만, 그는 한번도 한국으로 이익금을 가져오지 않았다. 복음을 위해 다시 재투자하겠다는 그의 원칙 때문이었다.

“노트북 가방공장을 하면서 이익이 많이 생겼지만 한번도 한국으로 그 돈을 가져오지 않았어. 아이들을 위해 학교 짓고, 선교사 숙소 세우고 그러다보니 한국으로 가져올 돈이 없더라고”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자신 소유의 땅 천평을 팔아 학교건물을 짓기도 한 것이다.

 
이런 박장로의 모습에 대해 주위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함께 동업하던 중국의 가족들도 내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 공장을 관리하던 현지 사장도 공장아이들에게 자꾸 잘해주면 작업진행이 어렵다고 이야기도 했고, 한국에 있던 집사람도 중국 가서 아예 집으로 오지 말라고까지 이야기 했었어”

박장로가 겪은 어려움은 가족들의 미온적인 지지뿐만 아니었다. 공장이 화재로 모두 불에 타버렸다.

“3년 전에는 공장에 전기누전 때문에 불이 나서 공장이 모두 타버렸어. 그걸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만 3년이 걸렸지만 다시 공장을 세우고나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


불타버린 공장을 어렵사리 다시 세웠지만 예전만큼 활기차게 만들기는 어려웠다. 박장로의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다른 공장을 찾아 떠나버렸다. 그러나 이런 위기는 오히려 박장로를 더욱 열정적이게 만들었다.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이제 사업을 할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중국청도 교남시에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해서 몇 년동안 7개교회를 개척했어. 보통 십자가를 교회 안에다 달기도 어려운데 교회를 세우고난 뒤에 종교국에서 교회건물에다 십자가도 달게 해주더라구.” 그래서 그가 세운 중국 나해시의 명성교회는 백평규모의 2층건물에 십자가도 번듯하게 세워져있다.

이뿐만 아니다. 박장로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중국단기선교를 지난 몇 년동안 꾸준히 진행해왔다. 그동안 진행해온 단기선교여행만 22차례, 800명의 사람들이 중국대륙을 다녀갔다.
 

박장로는 이제 또다른 비전을 꿈꾸고 있다. 수년간 해왔던 중국선교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복음을 전할 꿈을 가지고 있는 것.


“앞으로 사는 동안 아무것도 바라보지않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집중할거야”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하나님의 비전을 쫓아가는 박장로. 그의 삶에서 마치 85세의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외치며 하나님 앞에서 열정을 내뿜었던 것과 같은 기운을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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