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성경 낯설지 않아…목숨 건 탈북으로 영생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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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성경 낯설지 않아…목숨 건 탈북으로 영생 얻었죠”
  • 현승미
  • 승인 2007.01.2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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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대에서 신학공부하며 북한선교 꿈꾸는 정 순 희 성도

요즘 한국교회에서 새터민를 선교사로 키우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물론 저도 북한을 복음화 시키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같은 문화에서 자라난 새터민들이 그 책임을 감당하면 더 좋겠지요. 하지만, 모든 일에는 선후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차례의 탈북 시도 끝에 한 핏줄 한 민족의 땅 한국에 정착한 정순희 성도(분당 구미교회·김대동목사). 그는 새터민를 선교사로 세우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그들의 정착을 돕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아래 생활하던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전국에 새터민 출신의 신학생이 70여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절반 이상이 휴학상태지요. 진정 북한을 복음화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면 한국교회는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고, 북한선교를 재조명해 봐야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원한 약속을 지키고자 장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현재 신학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목회자의 길을 갈 계획이다. 그 누구보다도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명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가 북한선교를 향한 한국교회의 모습에 아쉬움을 내비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삶의 자리를 돌봐주고 신앙으로 안착된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도와줘야 합니다. 이 땅의 천만 그리스도인들이 새터민 한 명 한 명을 이렇게 도와준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믿게 되지 않겠습니까.”


죽을 고비 가운데 하나님 만나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그 와중에 누군가는 함께 떠나온 친구를, 누군가는 가족을 잃었다. 천신만고 끝에 한 민족의 대한민국 땅을 밟았지만, 낯설기는 마찬가지.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적응하기 어려운 사회 환경. 얼굴 생김새는 꼭 닮았지만, 새터민에게는 우리나라도 또 다른 외국으로 느껴질 뿐이다. 또한 중국이나 한국에서 기독교를 처음 접한, 아직은 신앙적으로 병아리 단계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고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구주로 영접했지만, 막상 한국에서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말투가 다른 자신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같은 인격체로 대하기보다는 신기한 구경을 하는듯한 모습은 고스란히 상처가 됐다. 어렵사리 정부로부터 받은 정착금마저 사기를 치는 사람들. 결코 하나님이 말씀하신 천국의 모습은 아니었기에, 죽음의 갈림길에게 굳게 맹세했던 신학생의 길을 내려놓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다행히 정순희씨의 경우는 신앙을 키워오는 동안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난 것은 1999년 가을. 중국의 한 농촌마을에서였다. 1994년 김일성 사후 북한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배급은 끊기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한 친구에게 중국에서는 집에서 기르는 개조차 쌀밥을 먹을만큼 풍족한 생활을 한다는 믿기지 않는 말을 들었지요. 어차피 굶어 죽으나 두만강을 건너다 죽으나 죽는 것은 시간문제였지요.”


두만강을 건너다 친구를 잃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친구 두 명과 함께 손을 꼭 잡고 두만강을 건넜다. 거친 파도를 거스르며 천신만고 끝에 강을 건넜지만, 함께 중국에 가기를 권유했던 친구는 저 멀리 주검이 되어 떠내려가고 있었다. 친구를 잃은 슬픔도 잠시, 그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위해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닥치는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중국도 새터민에게는 가혹하기만 했다. 정말 친구의 말대로 매끼 쌀밥을 먹고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지만, 돈 한 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임금을 요구하면 공안당국에 이르겠다는 협박과 구타뿐이었다. 결국 그는 죽어도 두만강에 빠져 죽으면 시체라도 고향 땅에 갈 수 있으리라는 일념으로 두만강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눈앞에 어른거리는 가족들 생각에 맘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갈 곳도 없었습니다. 그저 세상에 태어난 걸 원망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요.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나는 누구인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막상 노랫소리를 따라가보니 믿기지 않을 만큼 두만강가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 하나님을 만났다. 조선족의 작은 농촌마을의 작은 단층집.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둘러 앉아 책을 들고 노래를 부리고 있었다.


그냥 뒤에 앉아 있었는데 계속 눈물이 나고, 어느 순간 마음이 평안해짐을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간 후 전도사님, 집사님과 대화를 하게 됐는데 그때 처음으로 교회, 예수님, 하나님, 성경책을 알게 됐지요. 그날 저는 위로의 하나님을 만났지요.”


잘 맞는 ‘신앙의 신발’ 신다


막상 성경책을 펼쳐보니 낯설지가 않았다. 알고 보니 북한에서 평생을 살며 외웠던 김일성의 10대 원칙, 명언 등 모든 것들이 성경말씀을 조금씩 바꿔 만든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기본원리도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모습에서 그 모델을 찾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게 신앙의 신발을 잘 신겨 주셨지요. 거기서 농사 짓고 생활하면서 정말 말씀대로 기도했습니다. 그땐 잘 몰랐지만 전도사님을 따라 북한의 복음사역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도 열심히 기도했지요.”


그는 정착한지 1년여 만에 아들을 데려올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누군가가 중국공안에 고발하는 바람에 결국 끌려가 북한으로 돌아가게 됐다. 정순희씨는 함경도의 해룡감옥으로 아이는 고아들을 모아 데리고 있는 9.17상무로 보내졌다. 그렇게 다시 농촌교회로 돌아오기까지 3개월 남짓. 평범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에게 3개월은 죽기보다 더 참혹한 삶이었다. 그때가 9월. 북한에서는 이미 추위가 시작되는 계절이다. 간부들 앞에서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고, 좁은 문을 기어 들어가 몸도 겨우 누울 수 있는 작은 공간. 볼일조차 허락을 받아야 하는 짐승보다 못한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하루종일 무릎을 꿇은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기도하기 시작했지요. 그때 회심하게 됐습니다. 내 스스로 내 입으로, 내 마음으로 처음 죄인임을 고백하게 됐지요.”


정말 기적의 하나님은 한 달 만에 그를 중국으로 인도했다. 뿐만 아니라 아이와 남편, 가족들까지 온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살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셨다. 그는 그때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기적으로 가족 모두 탈북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그의 모든 기도의 응답을 들어주셨다. 심지어 한국에 정착했을때 배춘화권사(안동 동부교회)를 통해 흔들리는 그를 붙잡아주었다. 의심하는 그의 신앙을 더욱더 확고히 하고, 신학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 주셨다.


만약 배권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부적응자로 남아 있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정순희 성도.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목회자의 사명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또 하나 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온 세상에 알리고 증거하는 것.


저는 정말 확신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고, 그 참혹한 땅 북한에 태어나게 하셨지요.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셔서 예수님의 비참한 고통을 십자가의 사랑을 한 점만큼이라도 알게 하셨지요.


더 힘든 고난이 겹칠지라도 하나님을 만난 기쁨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는 정순희 성도. 그를 통해 진정 북한선교에 부흥의 불길을 피어올릴 앞날을 예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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