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 - 첨단사회 속 우상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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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 - 첨단사회 속 우상숭배
  • 윤영호
  • 승인 2007.01.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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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의지하려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따라서 미래학은 가장 관심갖는 현대의 분야이다. 미래학의 세계적 권위자 샤뮤얼 헌팅턴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하나님 자리 노리는 사악한 영의 횡포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 모든 것들에 대해 거부를

충분한 돈과 철저한 미래설계 의존도 갈수록 증가


“고대의 우상이나 현대의 우상이나 우상은 그것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세계관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폴 마샬박사(화란 자유대학)는 성경에서 지적하는 우상에 대해 종교영역을 넘어 삶의 한 부분으로 해석하면서, 우상이 그 사람의 생활습관과 가치관을 바꾼다고 말한다.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종교만이 우상숭배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상숭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로 적용된다는 것이 폴 마샬박사의 주장이다. 21세기 현대사회를 사는 한국기독교는 과연 우상숭배로부터 자유로운 것인지 적어도 폴 마샬박사의 잣대로 볼 때는 그리 안심할 것이 못된다. 한국기독교가 우상숭배의 교묘한 침투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 사회에 대한 선한 영향력도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


구약 열왕기하 23장은 타락해 가던 남유다를 깨끗하게 청소하기 시작한 요시야 왕의 치적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기록자는 8세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가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내린 한 가지 명령에 주목한다. 10년 동안 요시야가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리 만무지만, 기록자는 단 하나에 주목하고 있다.

“성전의 퇴락한 곳을 수리하게 하라.” 요시야 왕은 그 웅장했던 솔로몬성전이 낡아진 것을 보고 ‘즉시 수리’를 지시했고, 성경기록자는 이 부분을 가장 명확하고 크게 기록했다.

여기서 얘기하려는 부분은 요시야 왕의 성전수리 명령이나 그의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에 관한 것은 아니다. 열왕기하 23장 4절 이하로부터 14절까지의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방 신을 숭배했던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어떤 방식으로 섬겼는지 그들의 삶의 스타일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우숭숭배로 인한 사회문화 변질
먼저 4절을 보자. 바알과 아세라를 위해 만든 기명(器皿:뚜껑이 있는 그릇들)이 하나님의 성전 안에 놓여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변질과 혼합종교적 성향을 보여준다. 5절에서는 이방 신을 섬기게 하기위해 각 고을에서 분향하도록 했으며, 또 아세라를 섬기는 방식으로는 남자창기들이 모여 있어서 종교의식이 있을 때 난잡한 성관계를 벌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이 부분을 미동(美童)의 집을 헐었다고 기록한다.

10절에서는 몰록을 위한 숭배방식으로 자녀들을 뜨거운 불 가운데로 지나가도록 했다는 점이 드러나 있다. 다니엘서에 나타난 풀무불 사건은 우상숭배의 한 형태로 자리잡은 문화적 영향을 드러내 준다.

우리는 열왕기하 24장에서 나타난 매우 작은 부분을 통해서 우상숭배가 종교행위에만 그치지 않고 일반적인 삶의 방식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같은 결론은 결국 폴 마샬박사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우상의 형상을 닮아간다고 주장한 것을 지지하는 성경적 예이다. 시편기자도 135편 15절~18절에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상(偶像)의 성경적인 해석은 ‘피조물이 만든 신적인 형상’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개념이다. 피조물이 만든 신적 형상에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나온 갖가지 문명들도 포함된다. 이같은 기준과 관점으로 본다면,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 속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우상숭배의 요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음을 알게 된다.

불 속을 지나가고, 자학하는 행위를 통해 영성을 훈련하고 극한의 흥분을 체험하도록 하는 인위적인 행위 등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에 휩싸여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우상숭배를 지적하는 부분이 꼭 종교적인 영역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를 섬긴다고 해서 그것만 우상숭배는 아니라는 말인데, 이는 반대로 기독교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우상숭배자로 살아갈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매우 섬뜩한 표현이다.

진노하신 하나님, 버림받은 야곱족속
성경은 피조물이 만든 모든 일체의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말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각종 업적을 찬양하는 것도 우상숭배의 범주에 넣는다.

이스라엘 역사는 ‘우상’, ‘조각한 상’, ‘산당’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로 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우리는 우상숭배가 여러 종류의 죄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일체의 모든 죄를 일컫는 특별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땅히 있어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이 차지한 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2장6절~8절의 말씀은 우상숭배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야곱족속을 버린 이유가 열거된 부분인데, 여기서 이사야는 동방의 풍습을 지적하면서 이방인과 언약을 세운 부분, 금은보화에 관심을 둔 부분, 무한한 병거(군사력)에 매료된 부분 등을 폭로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젓가락까지 공경하는 우매한 짓거리라고 조롱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와 국가를 생각해 보자. 지난 세기 우리나라는 잘살기운동을 통하여 부국강병책을 지지해 왔다. 경제력 향상과 무기수입 및 개발을 최우선 정책으로 펼치며 우리의 가치관을 ‘번영’에 집중시켜왔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더 크고 더 화려하게 건축하는 붐이 소도시에까지 퍼져서 큰 교회만이 어깨를 펴고 걸을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불평을 자주 접한다. 지난세기 벌여온 번영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와 국가를 지배하는 가운데 이제 한국기독교를 점령하는 사태를 맞고 있다. 한국기독교가 과거의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번영의 이념을 그대로 방치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태에 직면하기까지 무대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앞다퉈 이루어지는 안전을 보장받는 조약들
야곱의 족속을 버리셨다는 하나님의 결정은, 점치는 자들과 거짓된 신들에게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겨냥하고 있다. 현대시대에서 이것을 바꿔 표현하면 무엇으로 비교될 수 있을까. 요즘 뜨고 있는 미래학이나 사회과학은 아닐까. 미래가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데도 우리는 과거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는 동시에 그 법칙을 따라 미래까지 조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주도권을 우리가 침해하는 일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야곱족속은 또 이방인과 타협해서 다른 길을 선택하곤 했다. 그들은  애굽과 바벨론처럼 강력한 국가들과 협정을 체결하고, 가까이 지내면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받을 것으로 생각했고, 또 자신들도 그들처럼 강력한 국가가 될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 없이 장래의 안전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불신앙 아닌가.

21세기를 사는 우리나라와 다른 국가들의 모습은 무엇이 다른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 조약을 맺고 교류하며 담합하는 등 매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국제사회의 협력 틀은,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잣대에 비교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다.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항한 나토,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 한 미 일 러 4개국의 교차승인, 아셈 등등 현대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조약과 협력의 틀은 어쩌면 ‘하나님 경외’와 ‘우상숭배’라는 미묘한 경계선에서 인간 스스로가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우상숭배는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창출해내어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고 동시에 폴 마샬박사를 비롯한 기독교세계관 학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마땅히 자리 잡아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국제관계의 조약서가 들어가 있고, 계약서가 들어가 있으며, 확장을 위한 설계도와 엄청난 돈이 들어가 있는 저금통장이 있어서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들의 계획이 결정되고 추진된다면 그것 역시 우상숭배의 더러운 관습일 것이다.

번영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갖가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기독교계는 조엘 오스틴목사계열의 번영의 신학(긍정신학)과 릭 워렌목사계열의 섬김의 신학이 급기야 충돌을 일으키며 복음주의 운동에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중이다. 그러나, 둘 중 승자가 진리편이라는 생각 역시 성급한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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