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구속사적 교회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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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구속사적 교회론을 본다
  • 윤영호
  • 승인 2006.12.1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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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교회론은 하나님의 구원과 연관을 갖는다. 따라서 현대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근거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솔로몬성전 모형도.


 

또 다시 거론되는 현대적 교회론 무엇이 문제인가 

오정현목사 “이스라엘 성전건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완성된 것”

만민구원 관점에서 민족문제와 계층간 갈등, 주변국 관계 등 입장정리돼야


교회이미지가 추락하고 있다는 걱정이 많다. 성장정체와 교인감소, 타 종교 성장이 눈에 드러나면서 교회이미지 실추 우려는 이제 걱정의 수준을 넘은 상황이다. 목회사회연구소가 주관한 개신교인의 가톨릭개종 원인과 대책 세미나에 예측과 달리 커다란 이목이 쏠린 것은 이같은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목회현장의 목소리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단순히 이미지만의 문제는 아니라는데 있다. 본질적으로 교회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회가 등을 돌리는 것은 아닌가라는 조금은 당혹스런 질문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초대교회의 영적인 파워를 제대로 계승받지 못한 채 현대 교회는 세련된 프로그램과 화려한 언변으로 허물어져 가는 영적 파워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초대교회가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공동체’로 불리는 것은 교회본연의 사명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정의할 경우 이 구성원들이 각자 맡은 곳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수행했는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 구성원들은 교회를 이루는 지체이면서 동시에 교회 그 자체이기에 이들이 세상 속에서 이루는 삶의 형태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현대시대의 교회가 그 영적인 능력을 잃어 시대를 선도하지 못하고 각성시키는데 거듭 역부족을 느낀다면 그것은 현대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문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성경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니라.” 이사야 56장7절의 말씀이다. 이 구절이 언급한 “일컬음이 될 것임이니라”는 예언은 상인들로 가득했던 성전(헤롯성전)을 정화했던 당시 예수님에 의해 비로소 실현됐다.

이사야가 예언적으로 언급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은 바로 성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사야가 밝힌 ‘만민’은 이방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기만 한다면 그리고 율법을 준수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백성이라는 자격을 부여할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성전에 대해서 “(이방인들까지 기도할 수 있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강조했다. 영적으로 교만한 이스라엘을 꾸중하시는 것이지만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핵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러나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문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초청에 응답하도록 하기 위해 기도하는 집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결국 성경에서 설명하는 교회(성전)는 “만민이 나와 만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곳”이라고 받아들여도 무방한 것이 된다.

이같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우리나라 교회의 영적 무기력증의 근원은 교회본연의 역할, 즉 열방구원의 수단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교회는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역시 하나님이 강조한 열방구원의 기도장소로서 교회론을 망각하고 권력의 도구와 삶의 한 부분으로 활용하다가 수치를 당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사랑의교회 오정현목사를 비롯한 현장목회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성전개념과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하나의 테마로 묶으며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한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을 행한 솔로몬의 치적 가운데 성전건축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생애 가장 주요 사업으로 구별한 성전건축은 전쟁을 많이 벌인 다윗보다는 솔로몬의 적합했다. 그러나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솔로몬 왕조의 죄값에 따라 솔로몬성전은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불순종과 회개로 이어진 두 왕조는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잇따라 패망하면서 포로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구원받은 백성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배우게 되는 대목이다.

이스라엘백성은 포로기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꾸준히 기대하게 됐으며 결국 기원전515년 스룹바벨 성전을 짓게 된다. 성전본연의 역할을 기대하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완악해져 있었다. 3차 성전인 헤롯성전도 그랬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은 과거 역사에 건립했던 성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성전’이었던 것이다.

솔로몬성전과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헤롯성전을 건립하면서도 실패만 거듭했던 열방구원을 향한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비로소 완성을 맛보게 됐다는 것이다. 새로운 차원의 성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만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시고 또 만민들은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지체요 성전들이며, 예수님은 이들 모두를 품으시면서 열방구원의 완성을 향해 격려하신다.

출애굽기 12장 37절 이하에는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탈출을 감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탈출군중 안에 속해 있던 ‘잡족’이라는 단어다. 빈궁탈출을 위해 요셉이 국무총리였던 애굽으로 온 야곱일가의 후손들이었던 출애굽 이스라엘백성들 속에 이방잡족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들도 함께 구출됐다는 이야기다. 이방인 구원은 따라서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이었지만 세속과 세상을 좋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 때문에 번번이 왜곡되고 굴절을 경험해야만 했다.

8년 동안 공사 끝에 성전을 완공한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이같은 섭리를 깨닫고 ‘만민을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내려달라’고 그 유명한 상량식에서 기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 대(代)에 이르러서 만민을 위하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가 아니라 왕권의 상징으로서 혹은 민족규합의 상징물로서 성전이 도구화되어감에 따라 변질을 피할 수 없었다. 남북왕조의 패망과 헤롯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조소는 바로 새로운 차원의 성전을 건립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 주고 있다.

21세기 속의 한국교회는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새 성전에 근거한 새 시도들이 변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열방구원이라는 성전의 본질을 망각한 각종 사업들을 재점검해야 할 것이다. 규모를 늘리는데 관심의 초점이  있었다면 불신자를 향한 관심을 증대시켜야 할 것이며 스스로를 기독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복음전도를 더욱 가열차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들은 변화하는 시대를 읽고 이 시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한 문화사조들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열방구원이 최종의 목적이지 세련된 교회프로그램이 목적은 아니다. 새로운 차원의 성전이신 예수님과 접붙임을 받은 우리 교회들이 과거 구약시대의 교회들과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할 상황이다.

수 십 년 동안 불거져 있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문제도 교회의 선교대상이어야 한다. 특별히 남북의 민족문제를 포함해서 심화되는 양극화  속에서 계층간의 문제, 세대간의 갈등 문제, 가정문제, 정부와의 문제, 외국인노동자의 문제 등 21세기에 직면한 각종 사회현안은 열방구원을 애타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명료하게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한국교회는 이같은 커다란 틀 안에서 교회(성전)본질을 회복하는 관심을 갖고 구체적인 논의의 장을 가져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선한 주도권을 가진 교회로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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