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1세기 한국사회와 기독교를 말한다-이기적 문화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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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1세기 한국사회와 기독교를 말한다-이기적 문화와 기독교
  • 윤영호
  • 승인 2006.12.1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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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허영 버리고 하나님 영광에 굴복하자”

개성이 강한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성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어색한 일이 아니다. 전근대사회 말기였던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개인보다 공동체가 강조됐던 우리나라에서 개성이란 ‘공동체성의 최소단위’로 인식됐었다. 현대의 개성은 전근대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성의 최소단위와는 다른 개념을 갖는다. 한 곳에 뭉쳐 살아온 지역개념인 공동체성이 현대에 와서는 계층군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직업에 따라, 취미에 따라, 적성에 따라, 경제적인 삶의 수준에 따라 개성은 다양한 양식을 띠며 현대사회를 모자이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개성은 과연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을까. 성경은 세상의 문화를 즐기되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분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이기적인 목적이라면 우리가 즐기고 있는 문화는 재론되어야 마땅하다./
 
흰소매 끝이 달린 검은 옷으로 치장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일상생활을 그런 차림으로 보낸 그는 특히 주일이 되면 더욱 그같은 옷차림새를 하곤 했다. 이 사람은 청교도였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었고 교회에 갈 때면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흐르곤 했다. 청교도의 옷차림은 검은색과 흰색의 조화를 특징으로 한다. 우리가 흔히 골이 따분한 옷차림으로 여기는 이러한 옷차림은 그러나 즐거움이나 색채의 기미를 모조리 억압해 버리는 절제나 엄격한 욕구에 대한 표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옷차림은 어떤 스타일, 특히 그 당시의 더 멋진 스타일을 반영한 것이었다. 검은색이 유행하던 시절 청교도들은 그 유행의 색을 하나님 영광을 위한 패션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옷이 드러내는 세상의 신분
1993년 10월 세계적인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은 한 패션쇼에서 ‘신청교도패션’(New Puritan Look)을 선보였다. 유명한 잡지 ‘인디펜던트’(Independent)의 패션담당 비평가는 캘빈 클라인의 패션쇼를 보고 “기도회에서 입었던 옷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고 썼다.

그 깔끔하고 곧은 선, 싱싱한 흑백의 조화를 가장 탁월한 멋으로 평가하면서 쓴 찬사이다. 현대시대 많은 사람들은 젊은 도시인들이 즐기는 청교도 옷차림에 대해서는 세련되고 멋스럽다고 말하면서도 시골의 한 늙은 사람이 입은 청교도 옷차림에 대해서는 ‘고루하다’는 말을 한다. 여기서 청교도 패션과 이를 현대감각으로 재디자인한 유명한 디자이너의 시도를 설명한 것은 기독교의 문화가 세상의 문화 속에 점차로 묻혀가는 현상 때문이다. 특히 그 문화 가운데 옷차림과 관련한 우리나라 기독교인의 생각은 의외로 관대한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백성된 사실을 세상에서 알리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교회에 갈 때에 한 해서만, 예배시간이 있는 주일의 특정한 시간대에 한해서만 기독교인이라는데 매우 익숙해 있다. 이는 우리가 교회에 있을 때 한해서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의 옷차림과 같은 일상 가운데서 기독교인으로 살기에 어려운 환경에 있음을 나타낸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의 폴 마샬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결코 우리가 좋은 옷을 입을 수 없다거나 매력적인 헤어스타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그 외 다른 몇 가지 몸단장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성경이 재기하는 것은 우리 정신의 문제이다. 우리가 으스대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가. 아니면 찬송을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옷차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가. 교회에서나 사무실에서나 백화점이나 우리의 외양을 가꾸는 동기는 무엇인가.”

창조세계를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성경의 정신은 과시도 허세도 아니며 단조로움도 실용성만의 문제도 아니다. 성경의 정신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옷을 입는 방식과 작물을 짜는 방식과 색깔을 사용하고 모양을 만드는 방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풍성함을 축하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상상력을 표현하는 풍성한 욕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태도는 어떻게 절약하고 어떻게 경축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미국의 한 빈민가에서 농구를 하며 삐딱하게 썼던 농구모자나 지저분한 로커들의 허름한 옷차림새가 유행을 결정할 수 있다면 어째서 우리 기독교인은 그렇게 못하는 것인지 한 번 생각할 일이다.

성경에 나오는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출애굽기 35장 이하에는 광야유랑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른바 기술자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 가운데 우리는 브살렐과 오홀리압 두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브살렐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며 보석을 깔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공교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성경의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들의 기술이 하나님을 향해 사용됐을 때 더욱 빛났음을 알게 된다. 서로의 기술이 모자이크로 모여져 조화를 이룸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찬란해졌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허영심
세상에는 많은 기술자들이 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와 함께 이기적인 욕망의 한 방법으로 그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기술이지만 무엇이 목적이냐에 따라 하나님은 다른 평가를 내리고 계신다.

창조세계의 충만한 하나님의 영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활용되지 못하는 기술은 참으로 불행하다. 금송아지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금과 은을 녹여 만든 첨단 기술의 결정체인 금송아지. 하지만 하나님을 반대하는 욕망의 상징으로 만들어졌을 때 하나님은 가차없이 징계의 불로 내리 찍으셨다. 삶을 표현하는 우리들의 문화 역시 하나님의 준엄하신 눈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9장 하반부는 욥바에서 죽은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르가 혹은 다비다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인이 병으로 죽은 후 베드로가 달려와 그 여인을 다시 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다비다를 다시 살린 베드로의 엄청난 능력이 아니라, 그녀의 주검 옆에서 흐느끼며 울고 있는 동료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느냐는 점이다.

9장39절이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였다.” 사회적으로 외롭고 힘든 처지의 여성들 가운데 따뜻함을 보여준 도르가의 일은 옷을 만드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당시 유행했던 옷을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과부들이 슬퍼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곁에서 늘 봉사해주고, 위해 주던 한 여인의 주검이 그들을 서럽게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 세상을 사는 기독교인의 정신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다비다는 자신의 기술(옷만드는 일)을 위로와 구제, 나눔을 위해 사용했다. 물론 앞에서 본 브살렐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결집시켜줄 가장 위대한 사역인 성막을 위해 사용했다.

사도행전 16장의 루디아는 자주장사였다. 염색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빌립보교회의 초대멤버인 루디아는 당시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각종 옷들을 다시 판매하는 도매업자였다고 한다. 두아디라성은 직물산업의 중심지여서 루디아는 많은 부를 축적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나온다. 하지만 그녀 역시 빌립보교회의 번성을 위해 자신의 직업을 즐거워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만과 허영과 으스댐의 원천으로서 패션을 즐겼던 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하지만 허영을 드러내는 치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베드로전서3장3절 이하가 그곳이다. 첨단기술을 자랑하는 현대시대의 기독교는 우리의 심정마저 이웃을 경쟁의 상대로 바라보도록 왜곡해왔다. 진부한 차림새로 보이면 무시해왔던 우리의 마음은 ‘왜곡’을 증명하는 것이다.

높이 솟은 건물이 기업의 경쟁과 오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옷 역시 오만과 허영을 드러내는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현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을 재다짐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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