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처럼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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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처럼 살고 싶습니다”
  • 송영락
  • 승인 2006.09.2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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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병원 운영해 25명의 선교사 후원하는 실 로 암 한 의 원

실로암한의원, 광주 동진한방병원, 실로암 군산병원에서 사랑실천

45여 종류의 야채와 과일 한꺼번에 먹는 효과 ‘실로암그린’ 개발

바울의 동역자로서 전도 여행에 동행 했던 누가, 바울로부터 ‘사랑을 받은 의사’로 불렸던 ‘누가’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당당히 말하는 부천 동주교회 김인수장로(실로암 한의원 원장,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1동 181-25/032-347-3400).

 

양방과 한방협진병원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환자중심, 인간중심, 환경중심병원으로 만들고 싶어 지난달 ‘실로암 군산한방병원’을 개원한 김장로는 한의사보다 ‘무명의 종’으로 불러달라고 말했다. ‘CBS 기획특강 건강플러스’의 방송 강사로 유명한 한의사로 불릴 정도이지만 김장로는 하나님 앞에 늘 부족한 종이기 때문에 ‘무명의 종’이 편하다고 설명했다.

 

실력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김장로는 3개의 한방병원을 운영하는 의사기업가로,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러시아 등 11개국 25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보내는 선교사’로, 미얀마의 43가정의 선교사 중 13가정을 지원하는 ‘가칭 미얀마선교사’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 부천시 소사구에서 초라하게 ‘실로암 한의원’을 시작할 당시 김장로는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전남 광주의 ‘동진한방병원’과 ‘양방과 한방의 협진병원인 실로암 군산병원’을 개원하여 지역주민들을 섬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창조의 원리에 따라 먹거리 문화를 바꾸는 45여 종류의 각종 야채와 과일을 한 번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실로암 그린’을 개발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실로암 그린’은 비만, 지방분해, 복부비만에 효과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식품에 대한 엄격한 과정을 적용하고 있는 미국의 식품FD에서 승인받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국내 식약청에서 통과하여 국내 판매가 가능하게 됐다. 이는 김장로가 ‘주식회사 실로암’을 세워 10년 넘게 임상실험의 결과로, 한약과 식품을 축출하여 자체적으로 개발한 식품이라는 점에서 더 믿음직스럽다.

 

이를 위해 대리점과 방문판매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하는 김장로는 식품판매를 통해 얻어질 이익금은 하나님의 지경을 확장하는 일에 선교사들이 쉴 수 있는 안식관을 건립하는데 사용할 계획이다.

늘 하나님을 먼저 생각면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김장로는 기독교적인 사명감으로 의료인을 양성하고, 의학을 연구하고, 사랑이 가득한 의료봉사자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모세처럼 신을 벗는 경험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개원당시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부천 소사동에서 조그마ㅊ게 시작했습니다. 실로암한의원이라고 이름 지어 성경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의욕도 보였죠.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잖아요. 당시 성령충만해 있었으니까 한의원 개원만 하면 잘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개원을 하고 기도를 했지만 환자가 안 오는 거예요. 1-2년 동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좋은 자리로 옮겼는데, 옮기자마다 그 건물이 팔려 다른 자리를 물색해야만 했습니다. 왜 어려움을 주시는지 하나님께 불평도 하고 다른 한의원자리를 찾아보면서 고민도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길 건너에 더 좋은 곳을 예비해놓으셨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제 생각에 하나님을 원망했던 거죠. 사실 한의원이 옮겼다고 하루아침에 실력이 나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옮기니까 환자가 배가 늘었습니다.”

한의원을 천직으로 알고 평범하게 살아왔던 김장로가 선교사를 무료로 치료해주고,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실비로 치료해 주고, 한의원의 이익금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3년 전 미얀마 선교를 목표로 실로암 세계선교회를 설립했습니다. 특히 미얀마 주변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를 겨냥해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9년 전 평범하게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미얀마의 파우목사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파우목사님은 양평에 있는 ACTS선교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파우목사님을 통해 미얀마를 알게 됐습니다. 파우목사님이 졸업 후 미얀마에 돌아가면서 초청을 해서 처음엔 놀러가게 됐습니다. 그때 미얀마에서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동일하게 그들도 섬기고 눈물을 흘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 가운데 정말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얀마를 향한 뜻이 있어 파우목사님을 만나게 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게 동기였습니다. 특별히 감동 된 것은 그분이 다리를 좀 절뚝거리셨는데 그 이유를 물었더니 복음을 전하다가 이교도들에게 몽둥이로 맞아서 부러졌다고 대답했습니다. 바울이 내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으면서 선교에 눈을 뜨게 됐지요.”

 

이렇게 하나님께 붙들린 김원장은 한의원 운영하랴 선교하랴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실로암 군산병원이 빨리 안정되어 지역주민들과 세계선교를 위한 젖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로암 군산병원은 내과, 신경외과, 가정의학과, 한방내과, 한방부인과, 한방신경정신과 등을 진료할 수 있는 양방 한방 협진병원으로, 성장클리닉, 수험생클리닉, 피부 비만클리닉 등 특수 클리닉으로, 현대병을 치료하는 병원으로, 쾌적한 환경 속에서 휴식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요양병원으로, 전인치유를 통한 재활의 기쁨을 드리고 있는 재활병원으로 자리 잡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로암 군산병원을 알리는 전단지에 ‘실로암 세계선교’의 사역을 소개하는 것이 더 기쁘다고 말하는 김장로. 실로암 세계선교회는 웬만한 선교단체보다 많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동, 서남 아시아 10개국 선교사 파송 및 협력, 년 2회 정기적인 의료봉사 아웃리치, 교회건축, 신학교 운영, 목회자 재교육, 기숙사 사역, 유치원 및 고아원사역, 제자사역뿐만 아니라 외국인 이주 노동자 사역, 신학생 장학사역, 월 1회 정기적인 농어촌 의료봉사, 선교지와 선교사들을 위한 중보기도사역 등 모든 것을 언급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하지만 김장로가 이렇게 선교를 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도 겪었다.

 

“처음에는 실패도 많이 했습니다. 헌금을 보내서 유용하게 쓰게 할 수 있었는데 열정만으로 하다보니까 실수도 많이 했죠. 좀 더 전문적인 선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의료선교를 주로 했고, 또 현장선교사가 아니기 때문에 미얀마를 알고 싶어서 1년에 한 두 차례씩 꼭 단기선교를 가서 의료사역도 했습니다.”

김장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좀 더 체계적인 선교를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 서울신학대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선교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한 김장로는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선교에 필요한 돈은 실로암한의원의 성장으로 채워줬다. 특히 피부병 치료와 비만치료에 유명한 한의원으로 알려지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료해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다른 병원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친절과 겸손은 입소문으로 이어졌다. 소사구의 지역주민뿐만 아니라 서울, 대전, 광주 등 전국에서 예약하는 환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김장로는 할 수 없이 전남 광주에 ‘광주동진한방병원’을 개원하게 됐고 하나님의 물질적인 축복을 더 체험하게 됐다. 이런 축복은 지난달 군산의 한방협진병원을 설립하는 기초가 됐다.

물질적인 축복은 계속적인 세계선교를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보내주셨다. 외국인노동자들을 보내주고, 미얀마선교에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했다.

 

“당시 파우목사님을 알게 되면서 국내에 많은 미얀마 노동자들을 만나게 됐죠. 노동자들을 심방도 하면서 노동자들의 인권이 굉장히 열약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실로암센터를 마련했습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위한 실로암교회를 자연스럽게 세웠습니다. 현재 임형재목사가 노동자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매주 직원예배, 성경통독으로 상술적인 이미지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의원으로 지경을 확장하고 싶다고 말하는 김장로를 통해 전문선교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한국교회의 희망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살고자하는 거룩한 씨앗을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경험 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은 헌신으로”

수도권에 천개의 병상이 있는 ‘선교병원’을 세우고 싶다고 말하는 김인수 한의사는 선교사들이 내 집처럼 찾아와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얀마에 5백 개의 교회를 설립하여 우상의 나라 미얀마를 복음화시키는데 전초기지를 마련하고 싶다고 말하는 김인수 한의사는 선교지에서 경험한 다양한 체험들을 자랑했다.

 

“복음이 접촉되는 지역에서는 이적이 자주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전기도 없고 물도 빗물을 받아먹을 정도로 열약한 지역이었는데, 마을회관에서 진료했습니다. 전혀 거동을 못하는 중풍병자가 왔습니다. 그분이 침을 맞고 3일 만에 일어났어요. 선교사님이 나중에 보고를 해서 알았는데, 우리가 봉사한 마을 사람은 전부 불교도였는데 교회를 세워달라고 했답니다. 마을 중앙의 가장 좋은 자리에다 교회를 세워달라는 요구에 선교사님이 교회를 건축했는데, 동네의 높은 불교관계자가 소식을 듣고 교회건축을 방해했습니다. 결국 교회를 다 헐고 마을 입구에 다시 교회를 세웠습니다.”

 

복음이 접촉되는 곳에 이적도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어려운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복음이 들어가면 승리하는데 그것을 누가 가지고 가느냐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선교전문가 수준에 이른 김인수 한의사는 미얀마에 5백개의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처음 미얀마에 방문했을 때 하나님께서 5백 교회를 개척하라는 사명을 주셨어요. 그래서 개척하겠습니다하고 그날밤 곰곰이 생각했죠. 아무리 생각해도 1년에 10개씩 개척하더라도 50년이 걸리잖아요. 그래서 그 뜻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을 키우는 사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현지인 5백명을 목회자로 또 지도자로 양육해서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면 된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5백교회가 아니라 5천교회도 세울 수 있겠죠. 그런 놀라운 비전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하나씩 해나가고 있습니다.”

 

어릴적 할머니의 기도를 잊을 수가 없다는 김인수 한의사는 어릴적 할머니가 늘 들려주시던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지금도 삶의 근거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모태신앙으로 자란 김인수 한의사는 대학시절 주일학교 간사도 했고, 음악을 좋아해서 학생 성가대도 지위했고, 대학부 임원으로, 학교에서는 CMF(전국의치한의대)에서 하나님을 섬겨왔다. 그곳에서 의료선교에 대한 꿈을 키웠던 김인수 한의사는 누가회 소속으로 여러 지역을 섬겼다.

  

“대학 졸업 후 89년도에 춘천에서 관리의사를 할 계기가 있었습니다. 함께 하시는 분이 구세군교회를 나가셨고, 특별히 한울산기도원에서 기도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가을날 회개할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을 주시는데 정말 주체할 수 없게 밤새도록 눈물을 주셨습니다. 예전 같으면 형식적인 기도했을 텐데, 사소한 죄까지 회개하게 했습니다. 그때 방언 체험도 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김인수 한의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달라졌다. 봉사는 헌신이 따르기 마련이다. 가장 피해를 보는 쪽은 부인과 세 자녀들이다.

“처음에는 불평도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전적인 후원자들이 됐습니다. 저의 받은 사명에 대한 비전을 나누고 집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해하게 됐고, 지난 구정 때는 함께 미얀마에 갔어요. 막내를 데리고 갔는데,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로부터 받은 기억 때문에 어릴적 경험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열약한 환경에서 사는 아이들, 돼지, 닭과 같이 뒹굴면 사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 많이 깨달았을 거예요.”

 

늘 섬길 수 있는 체력과 은혜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김인수 한의사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충분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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