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처 간직한 채,아직 잠들어 있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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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처 간직한 채,아직 잠들어 있는 땅
  • 김찬현
  • 승인 2006.06.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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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역사연구소 ‘6.25 전쟁유적지’답사 동행 취재기

 
우리 몸은 신비롭다. 조그만 생채기라도 나면 금새 발갛게 되고 심하면 피도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딱딱한 딱지가 앉고 더 한참이 지나면 언제 그곳에 상처가 있었냐는 듯 멀쩡해지니 말이다. 하지만 상처가 나고 딱지가 있었던 자리에는 처음 다쳤을 때 느꼈던 아픔 대신 흉터라는 댓가가 남아있다. 그래서 상처가 다 아물고 난 뒤에도 그 흉터를 보고 있노라면 다쳤을 때의 고통같은 것이 전해온다.

6월이다. 6월은 우리에게는 흉터같은 계절이다. 전쟁을 겪은 노인도, 전쟁을 겪지 못한 젊은이나 아이들도 6.25라는 우리 민족이 겪어야했던 가슴 아픈 흉터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더욱 그렇다.

철원은 우리 현대사에서는 미묘한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서울과 원산을 잇는 중요한 지점인 덕분에 철원지역을 지나는 많은 유동인구가 있었고 해방직후 38선으로 나눠진 후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가 6.25전쟁을 통해 다시 남한땅이 되었다. 북한사회와 남한사회를 동시에 경험한 셈이다.

서울 시가지를 벗어나 철원을 향해 북쪽으로 가는 버스. 버스에 설치해놓은 TV는 연일 축구 이야기로 채우고 있었다. 간간이 축구뉴스 사이에 끼인 북한의 미사일발사로 인해 미국과 북한간 돌고 있는 미묘한 긴장감은 마치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소식같아 보인다.

▲ 1시간동안 1만 5천명의 병력이 이동할 수 있는 규모의 제2땅굴
버스가 철원으로 가까워질수록 화려한 도시는 온데간데 없고 탱크를 막기 위해 곳곳에 설치된 5분방벽만이 눈에 띄인다. 서울에서 느끼던 그 평화롭던 세상은 사라지고 미묘한 긴장감마저 흐른다. 민통선을 지나 일행의 버스가 도착한곳은 제2땅굴. 동송읍 북쪽 13킬로미터가 지난 지점에서 1975년 3월 19일 발견된 제2땅굴은 한시간에 1만5천명의 병력이 이동할 수 있는 규모로 만들어졌다. 땅굴 입구에 세워진 ‘정전 19320일’이라는 간판은 결코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평화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서울과 원산을 잇던 경원선의 한 지점 월정리역. 월정리역이 자리한 지금의 터는 남방한계선 보다 북쪽 그러니까 비무장지대에 위치해 있던 것을 복원해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역이라면 당연히 기차가 있어야 하는 것이 이치이다.

그러나 월정리역에 있는 기차는 예전의 검은 쇳소리를 내며 웅장하게 달리던 영광은 뒤로한 채 지금은 그저 빈 들판에 숨죽여 누워있다. 힘차게 굴러갔을 법한 커다란 쇠바퀴 사이사이에는 제 키만큼이나 되는 풀들이 빽빽이 자라나있고, 이제는 견학나온 아이들의 사진찍는 동무가 되버렸다.

기차 뒤쪽으로 보이는 풀밭에는 지뢰밭 표시가 여기저기 보인다. 적을 막기 위해 설치했을 지뢰는 이제 우리의 걸음도 막아버렸다. 전쟁의 무서움이 바로 단절된다는 것이 아닐까.

38선이 우리민족의 허리를 갈라버린 이후 철원은 북쪽의 땅이 됐다. 당연히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그 땅에 자리잡게 됐고 그 때 세워진 건물이 바로 철원노동당사다. 전쟁이 사라진지 수십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이 건물은 아직도 그때의 상흔을 지닌채 묵묵히 서있다. 전쟁이 끝나면 상처는 아물기 마련일까. 벽돌 사이사이 총알자국으로 빼곡한 곳마다 이제는 여기저기 풀이 자란다.

그 모습이 마치 총알자국이 아니라 풀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모양같다.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민족의 상처에도 이렇게 새 살이 돋아 났으면….’ 한가닥 희망을 되뇌이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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