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변 르포(1) - 중국·북한 접경 지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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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변 르포(1) - 중국·북한 접경 지대를 가다
  • 승인 2001.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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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건 탈북 행렬,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민족의 오랜 시련의 땅으로 남아있는 연변. 이곳에서 조선족들은 중국국적을 가지고 반세기 넘게 한족과 더불어 생활해 왔으며 언젠가는 지척의 고향을 밟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는 북한이 복음화 되기를 바라며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연변은 선교 전략지로 매겨져 있다. 연변은 지금 북한과 미약하나마 접할 수 있는 곳이고 광대한 중국선교의 전초지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조선족들이 서 있다. 이에 여름 동북아 지역 복음화의 비전을 품은 사람들의 모임인 '비전 동북아팀'이 지난 8월 13일부터 21일까지 중국 연변에서 단기선교를 진행했다. 삼합-도문-훈춘-백두산에 이르는 '비전 동북아팀'의 연변 단기선교를 8박 9일간 동행취재했다. 본지는 총 4회에 걸쳐 북한과 중국선교의 가능성을 짚어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거친 비포장길 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비전 동북아팀을 태운 차량은 어느새 두만강을 옆에 두고 달리고 있었다. 두만강 건너 바로 저기, 지척이라 할만큼 가까운 곳에 북한이 보였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 철책을 통해서 밖에 북한을 접할 수 없는 남한과는 달리 두만강 접경지대는 한결 느긋하고 조용했다. 산자락의 북한마을과 두만강 줄기에서 헤엄치고 있는 어린이들의 여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북한 주민들의 목숨을 건 탈출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지금도 일주일에 서너명의 탈북자들이 저 강을 건너옵니다.”

안내하는 분의 한마디가 팀원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오갈 곳 없어 근처 한족과 결혼해 살던 북한 여성이 적발돼 소처럼 코를 꿰어 다시 북으로 잡혀갔다는 말, 이른 새벽 강물에 젖은 몸을 벌벌 떨며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겨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탈북자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는 말에 애처로움이 밀려왔다.

삼합에 도착해 조선족 노인들과 인근의 소학교를 방문하고 망강각(望江閣)에 올랐다. 그곳에 서니 함경북도에 속한 회령시가 버티고 있었다. 김일성이 그의 부인을 위해 만들었다는 나루터도 희미하게 나마 볼 수 있었다. 석탄과 석회석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어서 인지 회령땅에는 공장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국경다리가 삼합과 회령을 이어주고 있었다. 길이 3백여 미터의 다리 위로는 종종 화물트럭이 오가며 물품을 실어 나른다고 한다. 위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환자가 이송돼 오거나 의사가 약품을 가지고 회령으로 건너가 치료해 주는 경우도 있다고 전해 들었다.

가깝지만 멀리 느껴지는 땅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손을 들면 닿을 것 같고 가슴으로 안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50년이 넘게 가보지 못하는 현실이 얼마나 기가 막히냐는 노인분들의 체념 어린 말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경비가 느슨한 틈을 타 ‘비전 동북아팀’은 혹시 누가 들을까 나직한 목소리로 찬양을 하며 회령땅을 축복하는 기도를 드렸다. 통일이 되기 전까지 삼합을 복음의 돌파구로 삼으셔서 이곳을 통해 저 북한으로 당신의 기쁜 소식이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삼합을 떠나기 전 잠시 버스에서 내려 마을을 걸으며 땅밟기 기도를 했다. 적지 않은 어린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낯선 사람들의 무리를 대해서 그런지 경계와 관찰의 눈빛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안내하시는 분은 저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교사들에게 일종의 뇌물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가정통신문이 자연스럽게 발송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놀이기구 하나 없는 맨바닥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이 마음이 공허할 것 같다고 팀원 중 한 명이 나눴다.

“부유해 지려면 아이를 적게 나야 한다”

허름한 병원 현관을 열자 제일 먼저 반기는 문구였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길들여진 생명경시풍조 때문일까. 방금 전에 보았던 어린이들이 계속 눈에 밟혀 비전 동북아팀은 마을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왔던 길을 거슬러 연길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져 있는 도문으로 향했다. 도문도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남양시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문과 남양을 잇는 다리가 북한 쪽은 푸른색으로 중국 쪽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어 이곳이 접경지역임을 실감나게 했다. 다리 양끝에는 세관이 설치돼 있고 옥상에는 전망대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북에 있는 동생과 연변에 남게 된 형님이 전망대 끝에서 군인들의 감시를 피해 손짓으로 안부를 나눈다는 서글픈 상봉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감상에 잠길 겨를도 없이 사진 찍으려면 머리마다 20원씩 내라는 고함소리를 들어야 했다. 민족의 아픔과 애환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녁시간이 되어 북한에서 직접 운영한다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가운데에 마련된 무대에는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로 가는 길 풍경이 걸려 있었고 무대 한켠에 놓인 대형 TV에서는 남북정상회담, 남북탁구단일팀 결승전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8시가 되자 종업원 중 한 명이 마이크를 들고 ‘우리의 소원’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냥 보기에는 종업원이지만 외부에 나와 일하는 것은 북에서 최고의 계층에 속하고 당성이 충실한 사람만이 가능하다던데…. 저들의 통일과 우리가 떠올리는 통일이 과연 얼마나 동일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가사가 그렇지 못한 현 상황을 반증하는 것 같아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구자천기자(jcko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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