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1세기 한국사회와 기독교를 말한다-하)차별사회 방조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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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세기 한국사회와 기독교를 말한다-하)차별사회 방조하는 교회
  • 윤영호
  • 승인 2006.05.1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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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우월의식이 빚은 차별주의는 비기독교 행태
▲ 유대인600만명을 학살한 나치의 행각은 극심한 차별주의가 패권주의로 연결됐을 때 나타났다.

 

  

‘차별’이라는 단어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은 적어도 외형적인 측면에서도 좋음과 나쁨, 고매하거나 추잡함 등 그 어떤 영역에서 차별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어떤가. 갖가지 영역에서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차별의 시각으로 만물을 바라볼 뿐 아니라 차별의 시각으로 창조물들을 인위적으로 재단(裁斷)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이같은 모습은 창조정신 뿐 아니라 죄악으로 깨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다는 이 보혈의 개방성은, 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이스라엘에서 가장 최초로 적용됐던 것이다.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학자인 레슬리 뉴비긴박사는 인간의 권위를 하나님의 창조물과 연결지어 모든 인간에게는 침범당하지 못할 하나님의 권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진리’(truth and authority in modernity)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만약 우리가 탐구하려는 실재가, 그리고 우리가 그 일부분인 실재가 인격적 창조자의 작품이라면, 권위는 그 창조자에게 귀속된다. 반면에 실재가 그 자체의 내부에 있는 어떤 과정들의 결과라면, 예를들어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의 산물이라면 권위란 그저 우월한 힘을 묘사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 권력과 권위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기독교전통은 이 두 가지 경우 중 당연히 권위가 모든 존재의 창조자이신 한 분께 속한다는 전자의 입장을 지지한다.”

차별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에 의존한다는 창세기의 인간이해를 도입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특히 성경을 한 치의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인간의 권위라는 등식은 차별이 만연된 우리의 세상살이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인용이 될 것이다.

비기독교인으로 인류학자인 애슐리 몬태규박사는 인류가 ‘최초의 인간’하나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기독교의 태초인간 창조에 대해 긍정하는 발언을 했다. ‘인간에 관한 가장 위험스런 신화’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갖가지 변종이 있는 인간의 기원에 관해서는, 단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그들 모두가 생겨났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많다는 것 외에는 별로 말할 게 없다. 비교해부학, 고생물학, 혈청학, 유전학의 모든 관련 증거가 가리키는 결론이다.”

복음주의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박사와 비기독교 인류학자 애슐리 몬태규박사가 주장하는 인류기원에 대한 설명을 잘 살펴보자. ‘창조로 시작되는 기독교의 인류기원’과 ‘동일한 조상을 가진 태고적 인간’에 대한 두 주장들은, 비록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평행선을 보일지라도 ‘차별’에 관한 한 명확한 지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인간’을, 후자는 ‘동일한 조상을 가진 인간’을 보여주는 것으로, 결국 양자는 인간 가운데 나타나는 차별현상이 아무런 근거없이 이루어지는 관행임을 보여준다. 레슬리 뉴비긴의 말처럼 차별이란 ‘약육강식의 결과로서 우월한 힘을 묘사하는 것’으로 설명 가능할 뿐이다.

최근 교육방송은 ‘똘레랑스’라는 프로그램을 편성, 사회적 편견을 조심스럽게 비판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똘레랑스의 뜻은 차별을 극복하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방식의 존중은 물론 사상, 이념, 종교의 존중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인간공동체 유지를 전제로 한다는 의미에서 ‘한계적 자유’를 표방한다.

똘레랑스는 우리나라 근현대사 과정에서 가장 날카로운 갈등을 빚은 이념문제를 화두로 다루면서 최근부터는 동성애자와 병역거부자 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겨냥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똘레랑스를 사례로 든 것은 사회공동체가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뒤늦게나마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다. 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사람들은 차별의식 극복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면, 차별에 대한 사회적 대안이 속속 나타나는 가운데 유독 교회만은 차별의식 극복(혼혈문제, 미혼모자녀, 편부모 문제, 직업귀천의식 등)에 매우 인색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사회적인 문제를 껴안아야 한다는 점은 선교적인 측면에서 이미 논의가 끝난 주제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가 고질적인 사회문제 치유에 자처하고 나섰다는 얘기를 들어본지는 꽤나 오래된 느낌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들어 교회마다 물질적인 ‘구제사역’과 육체적인 봉사를 필요로 하는 ‘노력봉사’가 교회성장과 비례해서 증가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구제에 열심이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 우리는 현대사회가 갖는 독특한  캐릭터, 즉 정신적 영적 결핍의 파괴적 본능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약육강식의 동물적 생존 패턴으로 볼 때 차별은 ‘힘의 우월의식’을 드러내는 방편이다. 성장을 위해 우리가 만약 다른 교회와 목회자를 고의적으로 차별했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약육강식의 논리에 있다는 얘기다. 사회의 차별의식과 제도철폐를 위한 실험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 될 때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 일이다.

한국기독교 초기 복음이 가정 안에 전해지면서 종(從)들이 자유인이 된 사실은 사회의 고질적 악법들이 어떻게 무너지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준다. 피비린내 나는 유혈혁명이 예측하지 못한 가장 온건한 방법으로, 하지만 가장 파격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우리의 과거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고대도시 아테네에서 행한 그 전설적인 설교에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22절~31절을 통해 다문화 다원도시로서 위용을 자랑하던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했다. 눈여겨 볼 것은, 다종교 다문화 사회 속에서 복음의 특수성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는지 하는 부분이다.

영국의 설교가인 존 스토트박사는 이 부분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을 설파하고 ▲인종적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일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한편 ▲심판을 앞둔 그리스도의 최종성과 ▲교회의 영광과 함께 나타날 구속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이것에 따르면, 바울은 다문화 사회 속에서 기독교 역시 타협의 압력을 받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당당하게 주장할 이유가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바울의 사례는, 21세기를 사는 한국기독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교회 밖에서 전개되는 차별철폐 시도들이  자칫 인본적 가치관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각종 차별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과 해결방안 제시가 절실한 상황이다. 우리는 차별이 단지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회 속에 제도적으로 고착된 사실에 주목하면서 실업문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여성의 외모에 대한 편견을 포함해서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 학력 관련 사항 등 차별의식이 곧 실업을 포함한 생존의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차별을 방조하는 교회’의 직무유기는 사회적 소수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소위 ‘생명에 대한 직무유기’로 이어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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