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 상)차별주의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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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 상)차별주의 심하다
  • 윤영호
  • 승인 2006.05.11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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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니아에서 있었던 인종청소로 8천 여명이 살해 당했다. 차별의 참혹성이 드러난 사건들이다.

 

상> 차별에 최면 걸린 기독교인  

하> 계단사회 방조하는 교회


사회적 약자 두 번 죽인 차별 ‘교회도 한몫’    

최근 혼혈인 하인즈 워드에 대한 이야기가 한국사회를 강타하면서 전통적 단일민족을 앞세운 한국사회의 폐쇄성에 관련한 대대적인 수정작업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칼라시대로 접어든 80년대부터 방송출연 중단을 통고받았다는 대중가수 박일준의 고백은 우리사회의 냉대와 차별을 알게 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인이 즐기는 미식축구 결승전의 MVP 하인즈 워드에 대해 우리교회가 특별한 감정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설움을 씻고 일어선 한 인물이 우리 사회에 끼칠 힘과 용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가 부흥가도를 달리던 그 시대에 사회적 냉대와 차별을 견디지 못했던 한 어머니의 좌절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


혼혈인 대중가수들이 말하는 한국사회는 ‘생존의 전쟁터’로 압축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삶의 질을 생각한다는 것은 공상이며 낭만적 소설의 이야기 일뿐이다. 한국사회는 그저 주변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야 하루를 버티는 전장(戰場)이었던 셈이다. 하이즈 워드는 법적으로 미국인이지만 한국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이미 알고 있던 그의 어머니로서는 다인종사회인 미국이 오히려 자식키우기로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단일혈통을 강조해온 한국사회가 이제 다인종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자 함이 아니다. 하인즈 워드는 최근 급경사를 이루며 증가하는 우리나라 농어촌지역의 동남아시아 여성의 결혼추세와 맞물려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보도에 따르면, 한 지역의 경우 결혼한 농촌총각 가운데 60%이상이 중국 베트남 몽골 등 아시아지역 여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비율의 높고 낮음은 있지만 최근 농촌은 국제결혼과 이에 따른 혼혈아 문제가 지역사회 변화의 과도기를 주도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우리나라 지역 중 가장 보수성이 강한 곳이 농촌이라고 했을 때 이같은 지역구성원의 변화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어 시민단체와 정부 관련 기관들은 교육과 문화적응 등 다양한 각도에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인즈 워드가 고발한 한국사회의 실상은 무엇일까. 우리는 혈통과 피부색과 생김새에 따라 ‘인위적으로 나누어 왔던’ 차별의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첨단기술과 고도의 학문이 지배하는 21세기 사회에 뿌리박힌 ‘차별의식’은, 현대문명이 출산한 루키즘(lookism)의 상승작용을 타고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가 제기한 현대용어 ‘루키즘’은 외모와 용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내용으로, 그는 현대사회야말로 인종, 성(姓), 종교, 이념에 이어 ‘외모’가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로 나섰을 때 이마의 주름살 때문에 보톡스 주사를 맞았다는 실토는 외모가 선거에 끼치는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으며, 상대 이회창 후보에 대해서 ‘차가운 이미지’가 강했다는 평가 역시 국민들의 루키즘적 가치관을 반영한 대목일 것이다. 기업체 취업과 연예계 활동을 위한 성형(成形)은 루키즘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음의 통계는 우리 삶에 깊숙이 자리잡은 외모지상주의를 보여준다. 한 광고대행사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13~43세 여성 68%가 ‘외모가 인생의 성패에 영향을 끼친다’고 했고, 78%가 ‘외모가꾸기가 생활의 필수요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외모가꾸기에는 하루 평균53분을 투자하며 거울은 하루 평균8.3회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우리가 사는 사회를 ‘차별사회’로 받아들인다는 우울한 데이터이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사회 가운데 늘어나는 동남아시아 여성의 결혼과 이주노동자 문제, 이로인해 증가될 혼혈인문제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즈음에서 우리가 집중해야할 부분이 있다. 만연한 차별의식이 장애인들에 대해서도, 이혼가정에 대해서도 매우 편파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온통 편견이 지배하는 차별의식의 사회공동체를 선도하는 대신 이를 눈감고 있거나 심지어 이를 조장하는 타락현상마저 서슴지 않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 ‘차별’이라는 것이 한국교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세기 동안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 현상이 그렇고 2001년 9월11일 이후 시작된 이슬람에 대한 정치적인 편견도 심각한 상황이다. 내전으로 이 나라 저 나라로부터 구호물자에 연명하는 아프리카와 동유럽인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전쟁 중인 이라크에서는 요즘 여성납치가 성행한다고 한다. 이 여성들은 유럽과 인근 국가의 사창가로 매매되고 있는데 그 수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문제는 목숨을 걸고 사창가를 탈출한 여성에 대한 이슬람사회의 냉대와 멸시다. 더러워진 육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슬람권의 차별의식이 발동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 문제로 옮겨보자. 우리는 역사적으로 매우 부끄러운 과거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국가로 구성된 유럽의 경우, 종교개혁과 때를 맞춰 이루어진 ‘지리상의 발견’은 당시 성장일로였던 산업혁명을 더욱 가속화한 계기가 됐다. 그 이유는 산업혁명의 원료공급지로서 식민지가 필요했고, 한편으로는 대단위 공장을 가동시키기 위한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맑스나 엥겔스조차도 노예제도가 고대 원시사회 직후 나타난 것으로 파악했음에도 중세 봉건제도 이후 기독교가 한창 부흥기일 때 노예제도가 다시 복원됐다는 사실이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인 존 스토트박사는 기독교의 추잡한 과거와 관련해서 “노예주인들(유럽인과 미국인등 백인들)의 뻔뻔스러운 합리화에 오늘날 우리는 당혹감으로 얼굴이 붉어진다”고 말했다. 스토트박사는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사용한 백인들(대부분 기독교도였다)이 ▲노예제를 통해 야만인들이 고등문화를 접했고 ▲기독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고 ▲성경은 노예제를 규제하지만 정죄는 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있어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여기서 갑자기 노예제를 언급한 것은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한 차별현상이기 때문인데 유감스럽게도 남아공은 최근에야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를 철폐했고, 오스트레일리아 조차 얼마전까지 백호주의(白濠主義)를 유지했었으며, 유대인 600만 명이 나치에 의해 살해당했던 것이 불과 60년 전의 일이다. 심지어 인종청소라는 슬로건으로 유고 코소보가 피바다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최근 기독교계 매체와 각종 소식통들은 미국에서 나타나는 메가처치(초대형교회)의 경향을 두고 새로운 시도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호들갑이다. 정체된 교회를 성장하려는 몸부림 가운데 셀 교회, 가정교회, 소그룹목회, 제자훈련 등 새로운 성장기법들이 소개되고 있고 이 경향들을 쫓아가지 못한 목회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역자’라며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다. 교회가 고급화되고 실용화되며 세상의 행로(行路)를 따라가는 동안 ‘악마적인 차별의식’은 교회와 사회를 동시에 공격하면서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

‘의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잊혀진 지 오래다. 오로지 인종, 종교, 성, 이념, 외모가 구성하는 우월과 열등이 있을 뿐이다. 신약성경이 밝히는 지역교회는 사라지고 큰 교회/작은교회만이 있을 뿐이다. 도대체 하나님의 은혜와 구속의 기쁨을 맛볼 죄인들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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