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죄성망각한 인본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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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죄성망각한 인본세대
  • 윤영호
  • 승인 2006.05.0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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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체험 보다 관리양육시스템에 의존하는 세대
▲ 영적공동체인 교회가 기관과 조직의 성격을 강화한 결과 세속화위기에 직면했다.



 

첨단과학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21세기는 아이러니칼하게도 감성과 영성이 또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합리성을 강조했던 지난 세기를 비웃으며 부상한 감성과 영성의 세대를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자처하면서 휴먼테크라는 과학과 감성의 결합이 여러 곳에서 실험되고 있다. 인류역사상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는 물질주의가 이제는 감성과 영성의 옷을 입고 인류로 하여금 한 차원 승화된 물질주의 향유를 주도하는 것은 아닐까. 과학과 이성만으로는 향유했던 물질추구를 포스트모던이라는 감성과 영성의 키워드를 통해 다시 한번 도전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


어거스틴의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구원받은 신자라고해도 여전히 그 안에 부패성이 있어서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죄악만 양산하고 말 것이라는 이른바 ‘인간의 죄성’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 ‘개혁주의신학’ 혹은 ‘칼빈주의신학’은 바로 어거스틴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어거스틴의 사상을 이어받은 칼빈 추종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의 인간론은, 죄성을 지닌 인간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죄성의 핵심을 ‘원죄’라고 하면서 이미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어서 삶 전체를 오염시키고 결국 행동에 대해서도 통제불가능의 상태를 만든다고 했다.

요약하면, 첫째 원죄는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옮아가는 유전병이다. 둘째 원죄는 우리를 붙잡고 있어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강력한 힘이다. 셋째, 세대로 이어지는 죄책이다.

원죄에 갇힌 인간을 설명하는 예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것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진흙탕에 빠진 자동차의 예이다. 빠져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깊게 빠지는 자동차는 밖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진 트레일러의 구조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감옥에 갇힌 죄수의 예이다. 그 죄수는 스스로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 누군가 당신은 나올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허울 좋은 말뿐, 그 죄수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누군가 열쇠를 열어 그를 꺼내주지 않는 한 자유의 몸이 될 수 없다.

어거스틴과 개혁주의는 죄성을 가진 인간은 절대자의 무조건적인 간섭 없이는 도저히 죄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계시된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죄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오늘 우리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생존한 어거스틴에 대해 재확인 하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의 우리들이 자신의 이같은 실정을 망각하고 있다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고 있는 최근의 흐름 가운데 눈여겨 볼 대목은 교회를 ‘사회적인 조직체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회조직체는 법의 지배 아래 있어서 인력관리와 재무관리 등을 제재 당한다.

최근 2~3년 전부터 교회가 일반 사회법의 제재를 허용하고 있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불행하게도 이 제재는 교회가 스스로 자처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교회 밖에서 제재를 가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제재를 요청했다는 얘기다.

성직자의 납세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나 부교역자와 교회직원을 묶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그리고 교회 내 상위조직인 당회(최고의결기구는 공동의회)를 대신해서 교회기관 대표자들로 구성된 ‘실행위원회’(혹은 운영위원회)를 조직하는 등의 변화가 교회 밖의 강압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려는 자구책에서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것들이다. 실행위원회 구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이 적지 않지만, 납세문제나 노동조합 구성은 교회가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은 영적공동체라는 사실을 스스로 저버린 결과라는 지적이다.

납세하는 성직자는 떳떳함과 자신감으로 그렇지 않은 성직자와 구별될 것이 자명하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데도 교회스스로가 교회문제를 사회적으로 도덕과 부도덕의 교회로 구별지음으로써 납세하지 않는 성직자의 교회를 부도덕한 교회로 낙인찍을 수 있다는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노동조합 문제는 심각성이 더 깊다. 현재 열악한 환경에서 ‘충성’과 ‘헌신’을 미끼로 봉사를 강요당하는 신자가 있다고 하지만, 이 문제가 곧 노동조합 구성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노동조합은 권익단체로서 앞으로 사례비를 노동에 대한 대가로, 철야기도와 금요집회 등을 시간외 수당 및 특근, 잔업으로 표기하는 날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영적 공동체가 아니라 조직체요 기업일 뿐이다.

이같은 경향은 최근 대법원 판례로 나온 분규교회의 교회재산 분배 기준에 관한 것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교회 내 성도의 2/3이상이 있는 그룹이 교회재산 소유권을 갖는다는 판례인데, 그렇다면 나머지 1/3성도는 재산 한 푼 없이 교회 밖으로 쫓겨난다는 말인가. 99마리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귀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비유는 다수결의 합리성을 깡그리 무시한 ‘오류’인지 보다 깊게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사법부의 판단이 잘되고 못되고를 판가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사법부의 이번 판례가 교회를 ‘사단법인’으로 보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몇 년 동안 곳곳에서 나타난 도전들의 정체가 영적공동체인 교회를 기업(영리조직체)으로 매도하고 있음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이같은 경향과 도전은 결코 교회 밖의 현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시작되고 점차 그 세력이 확대돼 왔다는데 있다.

이 현상들을 보면서 전통교회 역시 대형화 추세 가운데 기업경영 방식의 목회관리 시스템을 차용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갈수록 거대해 지는 재정을 잘 관리하려는 목적으로 기업 재무관리 시스템을 적용했다면 그것은 ‘영리단체의 재무구조로 변환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수련관 건축비용 충당을 위해 ‘투자처’를 찾고 있다면 역시 교회는 기업일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21세기 문턱에 들어선 한국교회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7년에 일어났던 부흥의 영성과 사뭇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엄청나게 큰 죄성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비로소 발견한 신앙선조들이 하나님의 은혜통치와 긍휼의 지배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통해 부흥을 시작했다는 것이 100년 전의 가르침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사회적인 시스템에 의존하길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경영리더십을 갖춘 목회자에게 충성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는 시대가 됐다.

인권을 외면하고 있는 악덕 목회자를 견제하려고 구성하는 노동조합 역시 하나님의 은총과 거리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 시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대안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수 천 년 전 성경의 기록이 말하듯 은혜와 긍휼을 바라는 것만이 최선인 것처럼 보인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한 ‘번성과 창대의 복’은 무려 25년 후에 태어난 이삭을 통해 나타났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육체의 늙어짐을 느끼고(감성)판단해서(이성)하갈로 하여금 대(代)를 잇게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린 대신 인간의 판단과 전통관례(시스템)를 의지한 결과 현재까지 중동에서 갈등을 빚는 것은 아닐까. 은혜는 기다림과 인내를 수반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인간적인 대안이 없을 때까지 버틴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음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세대이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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