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세기 한국사회와 기독교를 말한다 - 절대주권 상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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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세기 한국사회와 기독교를 말한다 - 절대주권 상실의 시대
  • 윤영호
  • 승인 2006.05.0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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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는 지금 공존을 미덕으로 삼으며, 각종 민족의 문화를 공유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문화에는 민족나름의 종교성이 짙게 배어있어 매우 심각한 결과를 양산할 것이다.

 

총체적으로 도전받는 하나님 절대주권성  


최근 한국사회는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는다며 매우 부산하다. 전세계가 협상에 임하고 있어 우리나라도 이에 빠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무역자유화협상을 비롯 스크린쿼터제 폐지를 둘러싼 영화예술인의 항의와 농민들의 처절한 시위들이 매스컴을 한참동안 뜨겁게 달구었다. 이것을 보는 한국교회의 입장이 궁금하다. 예측컨대 국내적인 혼란에 대해서는 걱정하면서도 대한민국의 대외적인 위상변화를 위해서는 정부의 입장을 지지해야 하는 이중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사회가 처한 급격한 변화의 가운데서 기독교와 상충되는 함정들을 발견하게 된다. ‘절대 주권자로서의 하나님’과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성의 인간’에 대한 본질문제가 각각 재론되고 있다는 점이 그 함정들이다.


‘절대 주권자로서의 하나님’과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성의 인간’이 21세기에 들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미 4세기와 5세기에 끝난 문제가 무려 1,700년이 지난 현재 다시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각기 다른 전략을 구사해왔던 기독교가 또 한번의 위기를 맞으며 정체성 상실이냐 아니면 현대시대에 맞는 기독교의 옷을 갈아입으며 또 다시 훼절이란 오명을 뒤집어쓰느냐 하는 기로에 있다.

다음 기획에서 다루겠지만, 세계화정책은 비단 최근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세계화정책은, 각 분야에서 나타난 괄목할만한 첨단기계의 발전과 운송수단의 발달 그리고 대량생산되는 각종 소비재와 농산물 등으로 이제 지구가 하나의 운명체로 바꿔졌기 때문에 기존의 고립된 국가정책으로는 생존자체가 불가능해 졌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공동운명체로서의 정책을 수립해야 이른바 ‘윈윈’(Win-Win)으로서 상생한다는 주장이다.


혼합주의 위기 자처한 솔로몬의 외교정책

하지만 우리는 이런 현상을 배경으로, 솔로몬시대를 떠올릴 수 있다. 방법은 달랐지만 솔로몬 역시 모든 정책을 ‘화평정책’에 맞추는 한편 인근 이방족속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이 끈끈한 관계란 바로 결혼을 의미한다. 솔로몬에게는 후비 700명, 빈장 300명 등 총1,000여 명에 이르는 후처가 있었다(왕상11:3). 이 후처들은 자유롭게 이방신을 섬겼고, 이를 위해 솔로몬은 이방신전을 지어주는 지극한 배려를 보였다(왕상11:7,8).

결국 이스라엘의 배교를 주도한 솔로몬은 12지파동맹체의 완전한 결속을 이룬 아버지 다윗의 업적을 송두리째 날리며 왕국분열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국가와 사회의 목적이 성장과 부흥으로 결정되기 시작한 순간, 그 공동체는 이제 분열이라는 심각한 심판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은 가정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게 하나님의 교훈이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한국의 가정들은 혈연공동체의 명예를 존중하던 전통대신 일확천금이 가문의 명예를 높인다는 굴절된 믿음을 갖게 됐다.

자녀들이 공부해야 할 이유는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 위한 피나는 수련과정이며 부모는 자녀의 학업뒷바라지를 충분히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어깨를 펼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한 양육은 단지 영적인 영역에 속한 것일 뿐, 육적인 양육은 돈과 물질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절대 주권자로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최근 배교현상이 갑자기 일어난 돌발사태라고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나 ‘다빈치 코드’, ‘유다복음’ 등 하나님의 절대 주권자로서의 신성을 부정하는 경향들은 21세기 현대사조의 꾸준한 채색결과 나타난 배교경향 이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할 일은 부분적으로 방어막을 치며 기독교의 정당성을 ‘일일이’ ‘하나하나’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기독교의 대원칙’을 다시 공고히 세우는 기초작업에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화는 다양한 국가의 상품교류와 각양각색의 문화유입을 촉진할 것이다. 이 가운데 주목할 부분이 다민족의 종교들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다민족 종교는 ‘상생의 원리’에 근거하며 공존하는 성격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공존의 흐름 속에서 배울 정체성

세계화가 국제사회에서 공존하며 상생하는 방법을 배우는 기회로 설명되고 있다면, 우리는 이 가운데 펼쳐질 절대주권 하나님에 대한 희석화 작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반기독교 소재의 영화들이 그런 류(類)의 것들이다. 신성을 부정한데 이어 이성간의 아름다운 사랑 대신 ‘동성애’를 화려하게 채색한 영화들이 권위있는 상(償)을 휩쓸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의 하나이다. 절대주권이 통용되는 공동체에서는 상생(相生)원리가 무너지기 때문에 앞으로 이같은 경향은 갈수록 강도가 더 세지면서 매우 치밀하고 교묘하게 진행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100년이 넘는 역사를 통해 마련한 ‘절대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각 부문에서 쇄도하는 ‘함께 사는 법’이라는 검은 회오리에 휘말려 배교의 심판에 직면할 수도 있는 시대이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틴 로이드 존스박사는 그의 유명한 저서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를 쓰면서 “다양한 문제에 대해 교회가 일일이 방어적인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보다 이제는 너무 많은 문제 때문에 기독교의 대원칙, 즉 복음이 무엇이라는 원리를 설명해야 할 상황”이라고 밝혔다. 바로 이 시대는 로이드 존스박사의 입장이 절실히 요청될 만큼 사회 각 분야에서 반기독교적 요소들이 난무하는 실정이다. 일일이 방어하기보다 원칙에 충실한 기초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주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설명은 지난 4세기 경 이미 결판이 끝난 주제이다. 기원후 295~373년 사이에 살았던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논쟁자였던 ‘아리우스’가 그들이다. 아리우스는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신앙인으로 주장했다.


아리우스논쟁 통해 하나님의 절대성 증명

예수님을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주창한 것은 성경을 잘못이해한 결과라며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이었다는 설명이다. 인간으로서 예수님을 그린 최근의 각종 시도들은 이미 4세기 경에 끝난 해묵은 주제에 불과한 것이다.


당시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신성을 증명했다. 아리우스논쟁으로 남아 있는 교회사속에서 결국 기원후 451년 열린 ‘칼케톤 정의’를 통해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시며 진정한 인간”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칼케톤 정의가 내려지기까지 아타나시우스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같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아타나시우스의 당시 상황이 정치적으로 쫓기며 유배상황이었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고립된 상황에서 때로는 숨어있어야 했고 때로는 유배지로 고립된 생활을 했던 그였지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리스도되심을 증거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는 그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각 시대에서 큰 도전에 대항해야 했다. 그 도전은 총과 칼의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하면 회유와 타협으로 나타났고, 첨단 과학시대인 21세기에는 현란한 문화상품의 옷을 입고 세계화정책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타고 합법적인 신분으로 정착에 거의 성공한 듯하다.

반교회적 문화상품들이 개발될 때마다 일일이 대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모든 도전을 굳건히 넘을 수 있도록 교회의 기초를 다시 점검하는 일이 쉬울 것이다.

신학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은 물론이고, 성장을 목적으로 구성된 현대목회의 훼절경향을 바로 세우는 일도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갖가지 교묘한 술책이 개발될지라도 흔들리지 않을 복음의 기초를 충실하게 다져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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