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세기 한국사회와 기독교를 말한다 -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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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세기 한국사회와 기독교를 말한다 - 유토피아
  • 윤영호
  • 승인 2006.05.0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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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토피아사상의 기초에는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환경이어서 이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로드니킹 구타사건. 인종문제를 환경으로 설명하는 사람이 많다.

 

이상사회 옷 입고 등장한 현대판 펠라기우스 


지상낙원으로 표현되는 ‘유토피아’는 우리 현대인이 꿈꾸는 궁극이다. 우리들이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하고, 새로운 삶의 패턴을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지금 보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개개인의 삶을 풍족하게 하려는 목적에서다. 이는 태초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했던 에덴으로부터 최초의 인류가 쫓겨난 이래 그 상실된 주거환경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기도하다. 이같은 인류의 소망은 최근들어 복지사회 건설이라는 측면으로 나타났는가 하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공산주의 사회 역시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질주과정에서 파생된 결과물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유토피아에 대한 인류의 집착은 지난 세기 문명의 역사가 보여주듯 갈수록 확고하기만 하다.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인류의 생각은 한결같이 긍정적이다. 유토피아를 설명하는 현대언어 가운데 그나마 가장 설득력을 갖는 것은 ‘복지사회’로, 복지사회는 모든 물질적인 환경이 골고루 배치돼 있어서 누구나 균형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추구하는 욕망을 실현하는 최적의 환경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흡하지만, 어쩌면 우리들이 그토록 고대하는 ‘에덴동산’에 가장 근접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기독교 사상을 교묘히 바꾼 사이비사상

유토피아는 안락한 사회체계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 이 매력은 상상 속에만 있지 않고 우리 현실에서 그 실현 가능성을 매일매일 확인하기 때문에 그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던 의료혜택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간 것은 겨우 100년 전의 일이고 보면, 전국민적으로 혜택을 보는 의료계의 진보는 유토피아의 한 측면을 체험하는 사례일 것이다.


컴퓨터에 의한 가상체험, 그리고 현실화된 우주여행, 생명공학의 발달과 장기이식 수술 및 생명복제 등등 우리는 지금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살아생전 꿈같은 일로만 여겼던 일들을 겪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유토피아 열망이 기독교가치관에서 볼 때 왜 문제가 되는지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유토피아 사상은 기독교가 갖는 하나님나라 사상을 인본주의로 채색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지적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이루어가는 주된 동력이 ‘하나님’이심을 전제로 이를 무시한 유토피아사상에 대한 경계를 촉구한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은 하나님의 진행과정을 돕는 협력자요 도구로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인본적인 색깔로 덧칠해진 유토피아사상은 하나님 대신 인간이 유토피아를 이루어가는 주체로 설정돼 있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하나가 더 나타난다. 왜 인간이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주체여서는 않 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인간을 바라보는 철학의 시각은 가지각색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계몽주의적 인간관’이다. }

사실 18세기 때 풍미했던 계몽주의는, 현대사상을 가능하게 한 엄청난 결과를 양산했다. 이 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은 헤겔을 통해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창출됐고 마침내 공산주의가 현실로 나타났다고 하면 현대사조를 좌우할 만한 계몽주의의 엄청난 위력은 이미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理性)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인간다움’에 한 획을 긋는 등 인류역사에 적지않게 공헌했다. 그럼에도 기독교 관점에서 이 문제를 재조명하는 것은 유토피아를 빌미삼아 벌어지는 각종 폐해 역시 심각하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역사의 주인이요, 삶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용감하게 자신의 신세계를 창조할 수 있으며 또 그런 이유 때문에 선한 존재이다. 계몽주의는 교육을 통하여 죄와 악한 행위가 교정될 수 있다고 믿은 아리스토텔레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 교육학의 기초를 이루는 이같은 믿음은 철학의 초점이 신(神)에게서 인간으로 전환되었던 계몽주의 시대에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J.루소는 인간의 원래상태는 순수했는데 사회구조와 문명의 억압으로 사악해졌다고 주장한다.

“악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악하게 지배받은 인간에게 존재한다.”

이제 유토피아 사상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드러난다. 루소의 주장에 따르면, 지혜로운 정치와 균형잡힌 사회공학은 인간의 단점을 치료하기에 충분한 대안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변증법을 체계화한 헤겔의 뒤를 이어 경제학자 엥겔스와 맑스는, 루소의 이 대안에 따라 유토피아의 다른 이름인 공산사회를 주창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루소, 헤겔, 맑스로 이어지는 계보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주인이며 창조자로 그려진다. 유토피아를 달성하는 충분한 자격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더구나 장기이식을 시작으로 나타난 생명복제는 인간이야말로 자신의 유토피아를 위해 환경을 창조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나타난 최근의 비근한 사례이다.

물론 계몽철학의 긍정적인 측면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기독교적이며 반역사적인 결과까지 용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히틀러의 유대인 대량학살, 두 차례의 세계전쟁, 잔인한 지배자의 출현과 각종 사악한 사건들을 목도하면서도 인간이 선하다는 신화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죄성을 부정하는 교만한 발상

이 시대 기독교가 복음을 더욱 강조해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 인간은 선하다는 그릇된 신화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함으로써 유토피아를 건설할 아무런 자격을 갖지 않다는 점을 믿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라는 목적을 향해 그것에 유익이 되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수용하는 ‘실용주의’의 벽을 넘어서 인간은 죄성을 갖기 때문에 행동하는 하나하나에 죄의 열매가 맺힌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같은 시도는 이미 1,600년 전 해결된 문제였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에 벌어졌던 기나긴 논쟁이 그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죄 짓지 말 것을 결심하면 된다”고 강조하면서 “우리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주인”이라고 했다. 십계명과 예수그리스도의 모범이 있으므로 그에 따라 살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인간의 결심에 달려있다는 것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타락한 인간들의 내면에는 죄로 향하는 성향이 있다면서 이를 교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응수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펠라기우스는 일시적인 인기만을 누린채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유토피아 사상은 죄없는 인간이 만든 환경은 공의롭고 정의롭고 균형이 잡혀 있어서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이 믿음은 마약과 같아서 생명복제를 ‘신의 선물’로 축복하며 엄청난 수명연장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우리가 알아야할 점은 유토피아 사상이 기초한 ‘선한 인간론’이다. 단지 환경 때문에 죄악성이 드러난다는 루소의 주장 덕분에 요즘 설득력을 얻는 말들이 있다.

“내가 폐암에 걸린 것은 담배의 해악성을 덜 홍보한 회사의 책임이다.”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그가 범죄의 길로 들어선 것은 빈곤퇴치를 외면한 정부의 사회정책 때문이다.” “L.A.폭동을 일으키며 살인과 강도짓을 한 흑인들 역시 인종주의의 희생자일 뿐이다.” “난 성 중독증의 희생자이다.”

이 말들에 따르면, 도대체 인간은 책임질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저 환경이 빚어낸 희생양일 뿐이다. 유토피아 사상은 죄성을 가진 인간상을 부정함으로써 기독교의 죄성에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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