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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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
  • 현승미
  • 승인 2006.04.13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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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문화사역자로 활동하는 한국장애인문화협회 상임부회장 최부암집사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제가 장애인인 줄 몰랐습니다.”

갑작스런 방문에도 깔끔한 넥타이차림으로 반갑게 맞아준 한국장애인문화협회 상임부회장 최부암집사(영광성결교회·김창배목사). 그는 척추장애 1급으로 하반신이 마비돼 평생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 사역을 하면서 한 번도 그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장애가 지금의 사역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각자의 사명과 쓰임에 맞도록 보내주신다고 하셨지요. 제가 몸이 불편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장애인들의 불편과 고통을 잘 알잖아요. 그래서 그들의 아픈 부분을 치료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었고 그들도 저에게 편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가 장애인을 돕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80년대 초 장애인을 위한 한 방송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다리 때문에 학교에 갈 때 빼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냈습니다. 그때 시를 써서 14살 때 문단에 등단해 신동소리를 듣기도 했지요. 그런데 자만심에 빠져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겠다고 나섰지요.”


그러나 바깥세상에 대한 경험부족은 오히려 그의 글 쓰는 작업에 장애가 되었다.

“책상 앞에 몇 시간씩 앉아 습작을 해봤지만, 저 스스로도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늘 판에 박힌 현장감 없는 글 밖에는 나오지 않았지요. 그 때 별들의 고향을 쓴 최인호 등이 한참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고 저는 쓰린 패배감을 경험하게 됐지요.”


자신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깨달았지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던 그는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며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선배의 소개로 우연히 장애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하는 야외행사에 참여하면서 그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7년 만에 드디어 세상밖에 나오게 됐는데, 그때의 벅찬 감동은 어떤 설명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당시 70여명의 장애인들이 참석했는데 제 평생에 그렇게 많은 장애인은 처음 봤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너무나도 해맑은 그들의 표정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각양각색의 장애인을 만났다. 같은 아픔과 상처를 지녔기에 많은 이들과 다양한 대화를 하게 됐다. 기쁨과 아픔이 교차하던 그때의 만남을 그는 곧바로 글로 써내려갔다. 그 누구보다 자신 있는 장애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글에 담게 된 것이다. 스스로 장애인들의 대변인을 자처했다.


“80년대 초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지요. 장애인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비장애인과 똑같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때는 문화생활은 둘째치고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심어주는 게 중요했죠.”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이슈화시킬까를 고민하던 그는 우연히 목발을 짚은 장애인이 산을 오르고 마이클 킹이라는 미국인이 휠체어를 타고 5천7백km의 미국대륙을 횡단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됐다.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비장애인도 하기 힘든 국토종단을 해보겠다고 몇몇 장애인과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서울부터 부산까지 640km의 거리를 횡단하는 데 딱 열흘이 걸렸지요.”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각종 언론을 통해 국토종단 소식이 전해졌고, 인간승리를 이뤄낸 이들로 사람들의 인식이 하나둘 변해가기 시작했다. 개인독지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진행했던 첫 국토종단의 성공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고 목포에서 서울까지 진행된 2차 국토종단에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대한적십자대회를 비롯한 사회각계각층의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그는 내친김에 3명의 장애인과 일본과 한국 대학생 1천 2백여명이 함께한 한라산 등반행사에 참여했다.


“처음 계획은 도로가 나있는 일출봉에서 어리목까지의 1천1백km의 여정이었는데, 막상 어리목에 도착하니 욕심이 생기더군요. 대학생들 역시 함께 한라산 꼭대기까지 가보자며 힘을 모아 주었습니다.”


휠체어 앞뒤에서 끌고 밀어주고, 휠체어가 갈 수 없는 좁은 길에서는 청년들이 직접 번갈아가며 안고, 업어가며 그렇게 등반을 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걸어가기에 좁고 험난한 길을 함께 하며 진정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그때 함께 했던 대학생이 목사가 돼 최부암집사를 교회로 이끌었다.   


“돌이켜 보면 정말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청년들이 미끌어지면서 저를 놓쳐 천 길 낭떠러지와 맞딱뜨리게 됐는데, 바위틈에서 나온 작은 풀뿌리 하나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고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살아 날 수 있었지요. 분명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신 것이지요.”


혹여나 그가 자만심에 빠질까 우려하셨던 것일까? 처음으로 방송에 사용할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고,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던 그가 구설수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첫 국토종단을 성공해 사람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줬던 그에 대한 작은 오해는 더 큰 의혹과 부정적인 시각으로 일파만파 번져갔다.


결국 그는 모든 사역을 내려놓고 청주로 내려가 작은 비디오 가게를 꾸렸지만, 그것마저도 IMF로 인해 부도가 났고 10년 만에 다시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장애인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현재 자비량으로 장애인문화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사역을 펼치고 있다. 장애인들에게 영화나 연극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장애인 문화제, 연극제, 음악제 등을 기획해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어울리며 즐길 수 있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장애인 사역은 제 평생과업입니다. 비록 제 생활을 어렵고 힘들지만 누군가를 위해 쓰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이렇게 일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뼈와 뼈 사이의 연골이 석회처럼 굳으면서 중추신경이 눌려 하반신이 마비되는 척추연골합착증을 앓고 있는 최부암집사. 최근 몇 년 사이 상태가 악화돼 사회단체의 후원으로 두 번의 수술과정을 거쳤다. 재발시 수술성공 확률이 20%밖에 되지 않고 대소변기능도 상실하게 될 거라는 의사의 걱정에도 그는 하나님을 구주로 믿고 극복해냈다.


“그나마 시간제 파출부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돕던 제 아내까지 저를 돕다가 허리를 다쳐 대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최근에는 아들 녀석이 대퇴골무혈성괴사증을 앓아 대수술을 세 번이나 했지요. 아직도 몇 번의 고통스러운 수술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원망해본적은 없습니다.”


그는 이렇듯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잊지 않는다.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내가 어떻게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는 최부암집사. 그에게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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