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최초 여성 야구중계 아나운서 - KBS 라디오 윤영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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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최초 여성 야구중계 아나운서 - KBS 라디오 윤영미 집사
  • 승인 2001.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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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전하는 삶에 늘 '홈런'을 외치고파

“‘딱’ 잘 맞았습니다. 쭉쭉 뻗습니다. 중견수 키를 넘겨 홈런~ 홈런입니다. 이승엽선수 30호 홈런입니다.”

다이나믹한 야구중계에 언젠부턴가 카랑카랑한 여성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중견 방송인 윤영미아나운서(39·온누리교회 집사). 아직도 라디오중계를 들은 청취자 중에 ‘어, 여자 캐스터도 있네’ 라며 놀라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그녀는 1994년 중계를 처음 시작한 국내 프로야구 여성캐스터 1호다. 여자에게 금기시된 분야인 야구중계 캐스터로 자리잡고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야구중계를 향한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과 ‘기도’라는 놀라운 힘의 원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구장의 선교사를 자청하며 삶 속에서 하나님을 전하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아나운서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아나운서 인생의 시작은 강원도 홍천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평소 국어책을 잘 읽었던 그녀였지만 방송반 마이크 앞에는 설 수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방송반 선배의 결석으로 마이크앞에 서는 행운을 잡았다. 그녀는 그 행운을 시작으로 대학시절까지 꾸준히 교내 방송국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춘천 MBC에 입사하는 등 그 때부터 줄곧 한 길 인생만 살아왔다. 그러나 1991년 서울방송에 입사하면서부터 그녀의 아나운서 인생은 더욱 본격화 됐지만 확실한 부서가 정해지지 않은 채 2년을 보내는 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방송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못한 채 방황하고 고민하던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의지하던 하나님을 찾았다. 40일 작정기도. 회사에서 가까운 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하며 40일 동안 새벽기도를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드디어 40일째가 되었다. 그러나 응답은 오지 않았다. 쉽지 않은 새벽기도였던 만큼 분명한 길을 보여주시리라 기대했던 그녀는 회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날 회의 시간이었다. 갑자기 그녀에게 프로야구 리포터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야구중계를 꿈꿨던 그녀에게 리포터 제의는 기대에는 못미쳤지만 야구장 현장에 있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매일 퇴근 후 오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야구장을 찾아가 게임의 한순간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눈, 머리 그리고 마음에 담았다. 또 선수들의 신상명세, 구단상황, 야구규칙은 물론 스포츠 신문과 야구 관련 서적을 구입, 야구 지식을 쌓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특히 운전중에는 선배들의 야구중계 녹음테이프를 쉬지 않고 들었다. 목소리를 따라해 보기도 하고 소리를 질러 보기도 했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온통 야구 중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연습했다.

하지만 연습과 노력은 목표가 있어야 했다. 야구중계는 그녀만의 개인적 목표였지 회사측은 단순히 리포터 수준으로 그녀를 이해했기 때문에 회사와의 줄다리기는 너무 힘들었다. 야구중계를 여자가 하기는 너무 힘들다며 몇몇 동료들은 라디오 방송을 종종 권하곤 했다. 참으로 외롭고 고독했다. 그녀는 “하나님, 정말 이 일이 제가 해야할 일입니까? 너무 힘들어요”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40일 새벽기도 마지막 날의 확신을 계속 심어 주셨다.

공부하고 노력한만큼 잘 되지 않아 야구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남몰래 훔친 눈물도 많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이 길을 허락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인도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리라.”

그렇게 1년 동안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노력이 계속됐다. 그 시간들은 나약한그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회사에서 중계 모습 촬영 테이프를 제출해 보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결국 1년 동안의 피나는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야구 이외의 것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야구에 대한 것만 읽고, 보며 한 우물을 팠다. 야구장으로 출퇴근하고, 녹화해서 또 경기를 모니터하고 철저하게 야구광이 됐다. “과연 여자인 내가 야구 중계를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육체적 고통으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야구 중계는 ‘어느 아나운서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성취욕으로 버티어냈다.

1994년부터 KBS라디오를 통해 정식으로 야구중계를 맡게 된 그녀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는데 중심을 맞췄다. “하나님 저를 야구장 선교사로 삼아 주옵소서”라며 중계 전에는 화장실에서 기도했고, 중계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기도했다. 그녀는 중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므로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지난날 힘들었던 ‘훈련기간’이 하나님께서 그녀를 연단시키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목소리가 가장 중요한 직업임에도 목이 약해 많은 걱정을 했지만 중계하기 전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늘 들어주셨고 3시간 동안의 중계도 거뜬히 해낼 수 있었다. 장시간동안 소리를 질러대 목이 혹사를 당해도,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해 지쳐 탈진해 버려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이를 버릴 수가 없었다. 모든 선수와 심판, 감독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관찰하고 기록해야 할뿐만 아니라, 같이 중계하는 해설자와 야구팬들인 청취자들의 눈과 귀를 하나로 만들어야하는 아주 어려우면서도 매력만점인 직업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사로잡는 것은 풍부한 인간관계였다. 또한 그녀는 야구중계를 하면서 일반시민에서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계층, 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데 이 만남들이 바로 선교의 기회가 되기를 기도했다.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 자체를 너무나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야구장에서 목이 터져라 자기 팀을 응원하는 관중들 속에서 그녀는 결코 외롭지 않은 ‘야구장 선교사’가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도 속에 그리고 중계 속에 함께 하시고 역사하는 것을 중계가 진행되는 3시간 여 동안 생생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매일 새벽기도에 나가 며느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며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등 소중한 가족들을 통해 도움의 손길도 허락하셨다.

윤영미아나운서는 훈련의 시간과 중계를 통해 모든 일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지혜를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야구중계를 통해 더욱 적극적인 선교를 펼쳐 나갈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할 것이다. 윤영미아나운서. 그녀는 ‘야구장 선교사’ 아니 ‘생활속의 선교사’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김광오기자(kimk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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