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깊이 새겨진 ‘신앙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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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깊이 새겨진 ‘신앙의 흔적’
  • 현승미
  • 승인 2006.02.10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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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주목사가 들려주는 ‘종로선교이야기’
 

종로, 사람들은 흔히 종로를 젊음의 거리라고 이야기 한다. 지리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서울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만큼 다양한 문화적, 교육적 요소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활발한 발걸음을 느낄 수 있다. 최근 새롭게 단장해 문을 한국 최초의 극장 단성사를 비롯한 영화관이 종로에 모여 있어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댄다. 4년 전 안타깝게 문을 닫았지만 한국 최초의 서점 종로서적을 중심으로 영풍문고,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의 본점도 모두 종로에 자리 잡고 있어 만남의 장소로 이용됐다.


사람들은 또 종로를 역사의 거리라고 이야기 한다. 경복궁, 창경궁, 운현궁, 종묘 등 과거의 찬란한 역사적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3.1운동의 발상지이자 한국최초의 공원인 탑골공원도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육의전’이라 하여 합법적인 시장이 이곳에서 처음 시작돼 서울 사람들은 이곳에서 생활필수품을 마련했다. 지금도 관철동 골목 주단집과 인사동 골목 골동품 가게, 낙원동 떡전 거리에서 옛날 육의전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선교의 흔적 ‘숨은 그림찾기’

이렇듯 모든 역사적, 문화적, 상업적 발상지로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에 선교 초기 한국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에게 종로는 선교하기 좋은 황금어장이었다. 그러나 서울 한복판 종로에서 기독교 유적을 찾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이제는 거대한 빌딩과 상가 건물들로 가득 찬 종로 거리에서 옛날 선교사와 복음 전도자들의 흔적을 찾는 일은 말 그대로 ‘숨은 그림 찾기’다. 특히 주의하여 보아야만 초현대식 건물 사이사이에 숨겨 놓은 것 같은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이덕주목사의 책 ‘종로 선교 이야기’(진흥)로 들어가 보자. 마치 어릴적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처럼 이 목사가 들려주는 초기 기독교 선교 역사와 종로 곳곳에 숨겨져 있는 기독교 유적을 찾아가보자.


“선교 초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처음엔 서울 외곽 정동에 자리를 잡았다가 10년쯤 지난 뒤 선교에 자신감을 가지면서 서울의 중심인 종로로 진출, 서점과 예배당, 청년회관 등을 마련하면서 이곳을 한반도 선교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한국 최초의 서점인 종로서적을 세운 이는 미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정동에 자리잡고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을 설립했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선교에 자신감을 얻자 1890년에 이르러 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종로 ‘육의전’ 거리 한복판에 있는 집을 사서 서점으로 사용하며 이곳에 예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교인은 늘지 않았으며, 마침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들어가게 된 아펜젤러는 ‘선비 출신’ 최병헌에게 종로 서점을 맡겼다. 최병헌은 1894년 4월 종로통 서점에 입주하였다가 그해 10월, 중국인 매서인들이 살던 ‘향정동 집’으로 옮긴 후 서점과 교회를 맡아보았다. 그 때부터 종로통 서점에 ‘대동서시’란 간판이 걸렸고 향정동 집 대청은 주일마다 예배당으로 사용됐다. 이때부터 점점 종로 선교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정작 ‘종로 선교’의 불씨를 살린 인물은 ‘한국인 최초 신학자’로 유명한 탁사 최병헌이었던 것이다.


문서선교의 출발점

이후 최병헌이 1898년 정동으로 이사가고, 1902년 아펜젤러마저 별세한 후 대동서시는 정동의 감리교출판사에 흡수됨으로 그 이름은 사라졌지만 1907년에 그 집터를 대한성서공회의 전신인 대영성서공회가 사서 성경 출판과 판매 거점으로 삼게 되었으니 대동서시의 ‘문서 선교’ 맥은 이어진 셈이다. 또한 대동서시 옆에 자리잡은 예수교서회 역시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출판사로 성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대동서시가 처음 자리잡았던 성서공회, 기독교서회 빌딩 일대는 종로 선교 출발점으로, 한국 문서 선교의 거점으로 중요한 의미가 담긴 곳이다.


월드컵열기가 뜨거웠던 4년 전만 해도 종각역에 내리면 한국최초의 서점인 종로서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내년이면 한국기독교계의 100주년 행사와 맥을 같이하며 성대한 행사를 치렀을 종로서적이 불과 4년 만에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모습을 보며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다시 종각역으로 내려가 맞은편 길로 올라가면 옛 종로서적과 엇비슷하게 마주보는 곳에 YMCA건물이 우뚝 솟아있다.


YMCA와 기독청년운동

2002년 영화 ‘YMCA야구단’으로 현대인들에게 더 잘 알려진 YMCA는 ‘귀족과 청년층’을 겨냥해 만든 조직체였다. 선교 초기, 복음의 특성상 기독교는 강한 자보다는 약한 자에게,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에게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기득권층보다는 소외된 민중 계층에 인기가 있었다. 따라서 교회는 민중 계층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열린 마음’의 양반 지식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당시 저녁에 젊은 청년들이 즐길 만한 곳이 전혀 없었던 한국의 상황을 이용해 오락과 교육, 회합을 할 수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게 된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창립 당시 향정동(지금 인사동)에 있던 감리교 ‘중앙교회’ 한옥 예배당 건물을 빌려 회관으로 사용했으나 1904년 가을 학관이 문을 열자 사흘만에 학생 150명이 등록했고 4년 후에는 1,800명을 기록하는 등 사업이 급속도록 확장되자 넓고 편리한 새 회관이 필요했다. 마침 현흥택이 24칸짜리 기와집을 기부하자 주변의 다른 양반 집들을 사들여 회관 건축에 필요한 대지 1,200평을 확보했으며, 1907년 지금의 서울YMCA자리에 3층 건물을 세우게 된다.


선교사들의 의도대로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양반과 천민이 함께 신앙교육을 받고 예배를 드리고 서구운동을 즐기는 장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현재의 서울YMCA건물의 건축은 오늘날 더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종로에는 두 종류 길이 있습니다. 종로 큰 길은 말을 탄 양반과 남정네들의 길이었다면 이 피마길은 천민과 부녀자들의 길이었지요. 그런데 황성기독교청년회가 건물을 지으면서 이 피마길을 끊어놓아 천민이나 여성들도 할 수 없이 대로로 나와야 했고 거기서 양반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었지요.”



“종로에는 두 종류의 길이 있다”

도로에서조차 평등사회를 구현했던 과거 YMCA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최근 몇 년 동안 여성 회원들의 총회 참석과 의결권을 놓고 심한 대립을 겪고 있는 서울YMCA의 참담한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청년회관에 대한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뒷골목을 통해 3.1만세운동의 요람이었던 태화빌딩으로 가자면 백년 넘게 구수한 맛을 지키고 있는 ‘이문설렁탕’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으로 고려대학교 동창회관이 있고 그 건너편에 낡고 허름한 붉은 벽돌 창고 건물이 보인다. 바로 중앙교회에서 쓰던 ‘가우처 기념예배당’ 건물이다. 중앙교회는 이 예배당을 한 차례 증축하여 해방 후까지 계속 사용하다가 1975년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자리로 옮겨가면서 예배당 건물을 개인 출판사 성지사에 팔았다.


비록 훼손과 변형의 긴 과정을 거쳐 지금은 예배당 건물이었다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변했지만, 중앙교회, 대한성서공회, 한국YMCA, 근대 유아 교육, 여성 신학교육, 민족운동의 요람이요, 신학 교육의 최후 보루요, 교회 분열의 산 증인이요, 민족 수난의 현장으로 한국 기독교 역사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우처 예배당’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연합운동의 성지 종로5가

그 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태화빌딩 근처에서 장로교와 감리교의 두 중앙교회인 중앙교회와 승동교회를 만날 수 있다. 다행히 한때 5가권이라 불리며 한국 기독교 현대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기독교회관, 기독교연합회관, 여전도회관, 연동교회 등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서울의 중심지인 만큼 시대적 변화와 흐름에 민감한 종로에서 그래도 아직은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곳을 빼고는 대부분이 개인소유로 돼 있는 기독교유적이 언제까지 그 모습을 보존할 수 있을지 걱정스런 맘이 앞선다.


2007년 선교100주년을 앞두고 ‘근대화와 신식’의 상징 종로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기독교를 전한 신앙선배들의 숨결을 느껴보자. 이덕주 목사의 ‘종로 선교 이야기’를 들고 종로를 누비며 현대화 속에 감춰진 초기 기독교의 모습들을 찾아내 진정한 ‘어게인 대부흥운동’을 외쳐보자.   

  

이덕주목사는 감신대를 졸업하고 교회사 교수로 모교에서 한국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평소 “한국교회사는 발로 하는 학문”이라고 강조하며 직접 한국교회의 문화유적을 찾아 나서는 기독교문화지킴이다. 그는 이미 강화도와 정동의 유적을 책으로 묶어 소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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