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으로 고통받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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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으로 고통받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 김찬현
  • 승인 2006.01.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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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으로 아들을 잃은 김명국·박귀자 성도

2005년 2월 24일, 갑자기 영길이의 상태가 악화됐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손발이 바빠졌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영길이는 벌써 무균실에서부터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번!”
의사의 짧은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가냘픈 영길이의 몸은 전기충격기에 의해 허공으로 솟구쳐올랐다가 떨어졌다. 그러나 영길이는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길이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언젠가는 지금 이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김명국씨와 박귀자씨는 눈앞의 일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2시간쯤 시간이 흘렀을까. 박귀자씨가 의사들에게 힘겹게 말했다. “우리 아들 아프니까 이제 그만하세요.” 영길이의 몸 여기저기 꽂혀있던 주사바늘을 뽑아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영길이의 뺨에 정신없이 얼굴을 대고 부비고 힘껏 아들을 껴안았다. 살아있을 때는 감히 껴안지 못했던 아들이었다. 그렇게 영길이는 8년 17일 동안의 짧디 짧은 삶을 마감했다.


영길이의 아버지는 유명한 탤런트 김명국씨. 연극으로 잔뼈가 굵은 배우다. 1982년 서울예전에 입학한 이후 무명으로 크고 작은 연극무대에 서왔다. 아내 박귀자씨와 만난 것도 1990년 ‘세일즈의 죽음’이라는 연극을 통해서였다. 그 후 3년 뒤 아내와 결혼을 했고 이듬해 1994년 첫딸 소슬이를 낳고 3년 뒤에 영길이를 낳았다.


연극배우의 삶이 그러하듯 김명국씨와 박귀자씨의 가정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일 년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고작 500만원 정도. 그러나 삶의 이유인 연극은 질기게도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영길이는 그런 아빠의 삶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아이였다. 가난해서 맛있는 음식, 좋은 차, 재미있는 장난감은 많이 가질 수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연극배우로서의 아빠를 자랑스러워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2000년이 되면서 가난이라는 옷을 입고 살던 김명국씨의 가족에게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날품팔이, 휴지장사, 청계천 청소를 하면서도 연극배우의 자존심을 지켜오던 김명국씨는  IMF 때문에 더 어려워진 가정 형편을 위해 프로필을 만들어 기획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결되어 시작한 것이 맥도날드 햄버거 CF였다. 지금 사람들이 ‘맥도날드 아저씨’로 김명국씨를 기억하는 것도 이 CF의 영향덕분이었다.


김명국씨가 맥도날드 아저씨라는 별명을 얻게 된 후 가정형편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연극배우에서 탤런트로 등록되고 여기저기서 광고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내 박귀자씨는 “가난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우리 가족이 이전보다 더 행복해진 것은 사실이었어요”라고 회상한다.


그러나 이렇게 찾아온 행복도 잠시. 영길이에게 갑자기 병이 찾아왔다. 겨울철이라 그냥 단순히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영길이가 다리가 아프다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들을 들쳐업고 종합병원 응급실로 뛰었다. 혈액검사와 정밀검사를 마친 후 사흘 뒤 김명국씨 부부가 받아든 검사결과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영길이의 혈액검사 결과, 백혈구 수치가 아주 높게 나왔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5천에서 1만 정도인데, 13만 1천 550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러나 이들 부부에게 여유란 있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영길이의 상태가 심각하니 지금 당장 입원하고 항암치료에 들어가야한다고 했다. 이것이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대개 아이가 큰 병에 걸리면 부모들이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자책이다. 김명국씨와 박귀자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잘못하거나 부모의 유전적인 이유로 주는 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들은 마치 자신들의 잘못인양 자책했다.

그러나 영길이는 이런 부모의 마음을 마치 다 안다는 듯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치료를 받는 영길이를 볼 때면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어요.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어느 순간 눈물이 터져서 빰으로 흘러내렸죠. 그런데 우리 영길이는 그런 엄마 아빠를 보면서 ‘엄마, 아빠, 울지마! 아파서 미안해요’라고 말하면서 크고 퉁퉁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어요.”라고 박귀자씨는 그 때를 회상한다.


영길이가 이 땅에서 보낸 시간은 8년 17일. 투병생활을 5년 넘게 했으니 영길이의 생애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길이가 받았던 항암치료는 어른도 견디기 힘든 고통 그 자체였다. 독한 항암제를 몸안에 집중적으로 투여한 뒤 암세포를 죽이게 되는데 이 때 투여한 약의 독성은 건강한 몸의 세포도 함께 죽인다. 부작용이 엄청나지만 이렇게 하지않으면 암세포가 죽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셈이다. 영길이를 담당했던 의사도 치료가 시작되기 전 영길이의 부모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했다. 치료를 지켜보는 부모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할 정도의 치료에도 초등학교도 들어가지못한 어린아이 영길이는 잘 견뎌냈다. 그러나 이런 치료가 길어지면 환자 혼자만의 싸움이 되곤 한다.


투병생활이 3년째쯤 접어들었을 때, 영길이는 마지막 치료방법으로 제대혈이식수술을 받고 있었다. 제대혈이식수술의 부작용 탓에 영길이의 조그만 폐는 금새 물이 차 올랐다. 그래서 CT촬영을 하러 CT실에 자주 다녀와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타고 가던 영길이가 엄마에게 교회가고 싶다고 말했다. 자주 지나가면서 그곳에 교회가 있다는 걸 영길이도 알았다. 그날이후 영길이는 매일 엄마에게 교회에 데려다달라고 했고 교회에서 5분정도 눈을 감고 혼자있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길이는 그 때 기도를 했던 것 같아요. 아무도 교회가자고 말하지않았지만 병이 깊어지면서 자기 병을 고쳐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쩌면 매일 매일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던 영길이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긴 병원생활을 잠시 접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영길이는 온가족이 함께 교회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모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아이를 위해 무언들 못할 것이 있을까. 영길이 가족은 주일이 되자 온가족이 집 앞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 교회가 영길이 가족이 현재 출석하고 있는 순복음한성교회(함동근목사)다.


영길이 아버지 김명국씨는 “그때는 영길이가 병이 재발해 하늘나라로 가기 전이었습니다. 영길이가 아마 온가족에게 신앙이라는 것을 선물로 주고 떠나가려고 했나봅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영길이가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간지 이제 일년이 다되어간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애썼던 김명국, 박귀자 부부는 하늘로 올라간 아들 대신 이 땅에 남겨진 또 다른 아픈 아들들을 위해 살고 있다.


“영길이가 긴 투병생활을 거치는 동안 많은 아이들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워낙 중병을 앓고 있는터라 툭하면 재발해서 병원에 들어오는 것을 보곤 했어요. 병이 다 나은 줄 알고 희망에 차 퇴원했다가 재발되서 다시 병원에 들어오면 이 아이들과 가족들이 겪는 상실감이란 상상을 못하는 것이죠.”


김씨 부부는 이런 아이들과 가족들을 위해 조그만 나눔을 시작했다. 영길이의 투병생활을 기록한 ‘내 아이는 천국의 아이입니다’(랜덤하우스)라는 책을 펴내고 저자에게 주는 인세 전액을 백혈병소아암협회에 김영길이라는 계좌를 개설하고 기금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흔히들 먼저 보낸 자식은 땅에 묻지않고 가슴에 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명국씨와 박귀자씨는 아들 영길이를 가슴에 묻지않았다. 자식을 떠나보낸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고 이세상의 또다른 영길이를 위해 살아간다면 하늘나라에 있는 영길이가 영원히 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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