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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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
  • 이현주
  • 승인 2005.11.17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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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추수감사주일, 온유와 진서네의 `감사이야기`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11월 셋째주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추수감사 주일. 산마다 오색단풍이 붉게 물들었고 거두어 둔 곡식들은 창고마다 가득하다.

보는 것 만으로도 배가 부를 법도 한데, 사람들의 한숨은 그칠줄 모른다. 한 톨 쌀알이 있음에 우리가 힘을 얻고, 떨어지는 물 방울에 마른 목이 축여지는 것을 잠시 잊었나보다.

더이상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 9살난 아이가 부모에게 버림받고 쓸쓸히 죽어가고 외로운 노인들은 공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본다. 그런 이웃들을 보고도 기도할 수 없는 우리는 단지 메말라 버린 눈물만 탓할 수 있을까?

2년이나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던 온유(17살).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아이는 커다란 산소통을 옆에 두어야만 숨을 쉴 수 있다.

계속된 수술로 녹아버린 몸은 목소리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가 웃는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아프고 나서 가족들을 더 사랑하게 됐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신앙의 깊이도 더 깊어진 것 같아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충청도 한 시골마을에서 다섯 아이들이 뛰어 논다. 올망졸망 연년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들이다. 형들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막내 진서(3살). 뜀박질이 아직 서툴다. 행여 넘어지면 무릎을 ‘탁탁’ 두어번 털고 일어난다. 그 뿐이다.

없던 부모가 생겼고 없던 형들이 생겼다. 고맙지 않을 이유가 없다. 3살난 아이 혼자 견디긴 힘들었을 인생길에 이영선목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아빠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보듬어주는 아들만 다섯. 만남이 있은 후 이 가족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픔의 흔적을 지우는 일.

“아프겠지요. 그리고 아팠겠지요. 이미 뱃속에서부터 엄마와 이별을 준비했던 아이들이었어요.”

그냥 두었다면 외로움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을 아이들은 지금 엄마 아빠의 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로 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


“다운증후군이라뇨? 우리는 지금 행복증후군을 앓고 있는걸요.”

일곱살 민서는 다른 아이들과 약간 다른 모습이다. 남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왜 하필 저인가요?” 하나님께 되물으며 따지길 수차례. 불행으로 느꼈던 아이의 장애는 어느새 행복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아이와 함께 돌아간 자연의 삶. 그 속에서 엄마는 많은 것을 배웠다.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민서를 잘 키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정작 자기 자식조차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는 부모는 또 얼마나 많은지. 누구를 가르칠 것인가. 내가 배워야할 인생이 길거늘….

엄마 추둘란씨는 많은 것을 배웠다. 민서에게서… 그리고 자연에게서. 삶에는 정답이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닦아 놓으신 그 길을 걸어갈 뿐.

한없이 갖고도 부족하다며 불평을 늘어 놓는 시대. 남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는 부박한 삶이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부자였다. 가난도 아픔도 장애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면 남는 것은 단 하나. ‘감사’다.

번듯한 집도, 광나는 차도, 두둑한 돈도 필요없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것. 소박한 사람들의 삶이 더 행복한 건 바로 ‘사랑’과 ‘감사’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맛깔스럽게 버무려진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글=이현주기자 /사진=김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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