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비평 - 독신자는 교회의 이류시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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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비평 - 독신자는 교회의 이류시민인가?
  • 승인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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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독신으로 지낸다. 결혼을 모든 사람들의 유일한 선택으로 강조했던 예전과 달리, 독신을 선택하는 사람의 수가 늘고 있다. 그 결과 독신 역시 정당한 하나의 생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울 거주 주부 2백 명에게 딸이 독신을 선택할 경우에 대한 반응을 물었더니, 찬반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 독신은 과연 결혼보다 못한 선택인가?

독신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우선 모든 사람이 거치는 ‘청소년 및 성인 초기 독신’이 있다. 이 경우는 성장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통과하는 과정이므로 별 문제가 아니다. 또 다른 경우는 자발적인‘선택 독신’, 사별이나 이혼 등의 이유로 발생하는 ‘결혼 후 독신’, 여러 가지 이유로 성인기까지 지속되는‘비선택 독신’ 등이 있다.

결혼은 창조의 원리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께서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창 2:18), 독신보다 결혼을 더 정상적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개신 교회는 결혼에 규범적 권위를 부여하며 강조하였다. 그와 달리, 중세 가톨릭 교회는 독신과 독신주의를 더 높게 평가했지만, 이는 독신과 금욕을 더 높은 영성을 얻는 것으로 여기는 공로주의에서 기인된 실수였다. 나아가 결혼을 부정적으로 보아 독신을 선택한다면 이는 이교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신구약 전반을 통해 독신에 대해 균형있게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선천적 장애나 후천적 필요에 의해 고자된 자도 있지만,‘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독신)’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9:12). 독신을 장려하기 위해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택 독신’을 인정하신 셈이다. 바울이나 예수님 자신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바울은 결혼 문제에서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기를 바라면서, 각각 받은 은사(카리스마)가 다르기 때문에 결혼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다(고전 7:7). 고린도전서 7장은 분명치는 않으나 당시의 특수한 형편에서 주어진 교훈일 것으로 본다.

한편, 초대 교회에는 기혼 독신자들로 구성된 모임이 있어서, 교회 직임의 한 형태를 구성하여 교육과 보살피는 사역에 봉사했음을 알 수 있다(딤전 5:9~10). 이는 결혼관계가 종결된 후 ‘기혼 독신’을 선택하는 일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또 한편, 가족 부양이나 보람된 일에 몰두하는 등의 이유로 뜻하지 않게 독신이 되어버린 경우도, 저들의 궁극적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는 한 최선의 선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적 소명에 따라 자발적으로 선택한 독신은, 배우자 탐색에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도 없고, 가족을 부양할 부담도 없으므로 더 온전히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유익이 있다(고전7:25~38). 하지만, 독신은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해 인간에게 의도하신 복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므로, 그에 뒤따르는 고통과 애로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미혼자가 자발적으로 독신을 선택하려는 경우,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독신의 은사가 있는지, 하나님 나라를 최우선 순위로 추구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선택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결혼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결혼이 성의 표현을 위해 하나님이 부여하신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결혼의 복을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포기한다면, 독신은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독신자들을 배려하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독신자 역시 여전히 성적 존재로서 친밀한 유대를 필요로 함을 알아야 한다. 교회가 최상의 교제와 밀접한 우정의 터전이 되게 하여, 기혼자와 독신자들이 연합된 가운데 복음의 진보를 나타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강인한(천안대 기독교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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