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광복60주년 특집 : 통일과 화해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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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광복60주년 특집 : 통일과 화해의 시대
  • 윤영호
  • 승인 2005.08.23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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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윤리를 뛰어넘어 도덕적 지배력을 강화하라”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경영을 목표로 국가권력을 집중했던 나라들의 일대 격전으로 압축할 수 있다.

나찌즘과 파시즘이 공존하며 석권했던 유럽지역과 아프리카 일부지역, 그리고 대동아공영권 회복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음질한 일본의 아시아 석권과 미국의 아시아 일부 점령. 우리는 세계대전이 소위 약소국의 문제가 아니라 강대국의 끊임없는 세계경영 야욕에 근거해 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21세기 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범하기 쉬운 점은 이같은 ‘세계경영 야욕’의 참담함이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45년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는 생각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이 특정국가의 세계경영을 통해서 자신의 구속사역을 펼쳐오셨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세계최대 강대국으로 성장하는데 전심을 다해 협력해야 할 것이다.

국가발전과 냉혹한 세계적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권자되심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강력한 방법이 될 것이므로, 교회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국가가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 유지하도록 늘 정책결정과 논의의 장(場)에 참여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지 5년이 지나는 현실만을 바라보아도 우리는 하나님이 강대국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운동을 실현한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 세계경영에 나서는 일부 강대국들이 보여주는 형태들이 도리어 세계를 예기치 못한 혼란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일본은 더 이상 지배권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지배를 받은 필리핀도 마찬가지다. 인도에서 역시 영국의 지배권은 더 이상 식민지배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프랑스, 오스트리아, 서부 러시아 등 독일의 지배권력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다. 그러면 과연 각 국가들에게서 지배권력은 하나도 없는 것일까.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지배권력 없는 자유를 만끽하며 해방의 즐거움으로 충만할까.



진보가 가져온 그늘부터 거두어야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60년이 지나는 동안 한 가지 집착으로부터 늘 자유롭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성장, 발전에 대한 얽매임이다. 우리는 이 같은 생각을 갖고 반세기 이상 살아왔고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지구가 끝을 다하는 날까지 성장과 발전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성장과 발전을 한 단어로 ‘진보’라고 한다면, 세상이 추구하는 진보야 말로 우리 기독교가 미덕으로 삼아온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 번 재음미해야 할 때라고 본다.

성장과 발전이라는 두 축은 진보를 이루는 가장 적절한 단어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이 기독교가치관으로 볼 때도 항상 그런지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경제문제를 보자. 지난 60년 동안 세계는 엄청난 경제발전을 체험하고 있다. 높이 솟은 빌딩과 첨단화 하는 업무전문화 그리고 기계설비의 발전에 따른 상품의 대량생산과 높은 품질. 우리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경제발전의 현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국가안보 문제도 그렇다. 재래식 무기를 넘어 이제는 첨단무기로 무장한 엄청난 수의 군대가 속속 창단되고 있으며 핵개발에 따른 무기의 전략화가 이루어져 이제 지구는 핵무기 속에서 자국의 안보를 맡기게 됐다. 각 분야를 검토하지 않아도 우리는 과학기술 발전 덕택에 엄청난 혜택을 누리며 성장과 발전이라는 가치관을 점차 강화시키는 중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엄청난 실업률과 노숙자 증가, 도시빈민 출현과 저임금 노동자의 억울한 하소연 등등. 경제성장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동안 또 다른 한켠에는 좌절과 고통을 탄원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핵 안보를 주창하는 진보주의자의 노력은 지구를 수백번 터뜨리고도 남을 만한 가공할 위력의 무기생산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든 그 무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의 목숨을 위협 당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해방60년 이후 현재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이같은 형국을 용인하는 이상 우리가 바라는 ‘통일과 화해의 시대’는 결코 우리 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실직 당해서 노숙하는 사람들의 저항심과 비관, 첨단무기로 무장한 군대의 침략을 받은 사람들의 비굴함과 분노, 개발이익에 눈 먼 사람들로 황폐화하는 환경을 회복하려는 투자가 집중되면 될수록 더욱 황폐화하는 자연의 울부짖음 등 성장과 발전에 비례해서 커지는 ‘진보의 그늘’의 존재는, 세상이 말하는 성장과 발전의 허구를 증명하는 것일 뿐 적어도 기독교의 눈으로 볼 때는 ‘극렬한 죄성’을 볼 뿐이다.



우상숭배로 찌든 세계의 참담함

지난 60년을 일컬어 발전의 시대요 세기적 성장의 시대라고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지난 60년을 반성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우리 모습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추앙하던 과학적 가치관의 결과물들로부터 우리가 도리어 얽매여 있는 현실이 그것들이다.

안전을 보장해야 할 핵이 우리의 생명 뿐 아니라 인류의 존재자체를 위협하고 있으며, 개발명목으로 편리함을 추구한 우리들의 복지전략이 자원고갈과 생태계 파괴, 환경오염을 부추겨 우리의 복지는 허울 좋은 명목상의 현상으로 전락하는 중이다.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경제학과 문화철학을 가르치는 하웃즈바르트 박사는 이같은 인류의 위기현상을 벌써 간파하고 ‘주인을 배반한 우상들’로 압축했다.

신앙은 보수적이면서 사상은 진보인 그의 진단은 기독교60년을 회고하며 향후 미래를 세우려는 한국기독교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를 가질 만 하다.


그는 현대세계인을 모든 영역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매우 비관적인 어조로 파악하면서 이 우상을 혁파하는 일이야말로 기독교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라고 진단했다.

그의 생각은 앞에서 제기한 안보문제, 환경문제, 경제발전 문제, 물질적 번영의 문제 등을 일련의 우상으로 보고, 이것들을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문제는 기독교가 이데올로기 형태로 나타난 우상을 맹목적으로 신봉한다는 데 있다는 점. 인간이 만든 것들을 신봉하며 도리어 그것들로부터 구속받는다는 아이러니가 기독교 안에서 조차 우상숭배로 이어진다는 냉혹한 비판이 깔려있다.


하웃즈바르트 박사의 주장은 해방60년을 맞은 한국사회와 기독교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성장제일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온 한국기독교의 전통이 결국 우상숭배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은 아닌지 하는 반성이 그것이다.

바르트박사는 각 분야에서 이루어진 우상들은 인간이 형성하는 공동체의 특성을 따라 서로 연결고리를 맺어 결국 인간공동체를 규지하며 얽매이는 역기능으로 작용한다고 경고했다.


성장이데올로기, 물신주의, 안보이데올로기 등 모든 것들은 이미 연대전선을 형성하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유지를 방해하고 그의 주권자되심을 매우 구체적으로 훼손한다는 것이 하웃즈바르트 박사의 강조점이다.



하나님과 관계회복 그리고 피조물의 일치

아도르노, 호르크 하이머 등 소위 프랑크푸르트학파로 유명한 철학자들은 인간이성을 극진히 신뢰하던 계몽주의 사조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인간이성의 황폐함을 적나라하게 증명했었다.

그토록 신뢰하던 인간의 이성도 전쟁을 통해서 얼마나 야수처럼 잔인할 수 있는지를 전쟁의 참상을 예로 들어 설득해 나갔다. 이것이 바로 ‘계몽의 변증법’을 설명하는 그들의 강조점이다.


기독교세계관은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으로 이루어진 가치관이다. 문제는 교회가 이같은 가치관을 현실 삶에 어떻게 적용하며 그 운동력을 증진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모아진다.

지난 60년은 사회적인 가치관, 소위 인간이성에 뿌리박은 가치관에 근거하며 교회발전을 도모해 왔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성장과 발전을 지지하는 신앙성숙, 사회공동체에서 신앙인의 도덕적 우월성, 사회윤리 영역을 초월하는 교회의 영향력 등 성장을 증명할 수 있는 내적 성장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외형적인 성장’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더욱 가까워진다고 하지 않는다. 지배와 군림의 인간역사가 협력과 연합의 동거로 이어진다고도 하지 않는다. 성경은 전인적 부패를 고백하는 인간과 이를 용납하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비로소 관계회복이 이루어진다고 증거한다.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를 기초로만이 피조물 간의 일치도 가능하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요체이다.


해방60년을 맞은 한국기독교는 이제 다가올 60년을 향해 중단 없는 전진을 계속하되,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세상의 우상숭배 행태를 경계하는 단호함을 재확인해야 한다.

물신주의의 위험 속에서 교회를 수호하는 협력체제를 한국의 틀을 벗어나 세계교회들과 함께 구성하는 노련함을 추구해야 한다. 하웃즈바르트박사는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물맷돌의 의미를 되새기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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