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발견한 희망의 빛
상태바
절망의 끝에서 발견한 희망의 빛
  • 김찬현
  • 승인 2005.08.09 2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난치성 희귀질병인 근육병 앓고있는 환우공동체 `더불어사는 집`
 


 체세포 복제를 통해 복제양 ‘돌리’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이언 윌머트교수가 최근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이 최근 화제가 됐다.

윌머트교수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은 줄기세포연구의 대명사인 서울대 황우석석좌교수와 만나 근육병의 일종인 ‘루게릭병’에 대한 공동연구를 위한 준비를 위해서라고 알려졌다. 줄기세포연구에 대한 찬반을 일단 접어놓고 ‘루게릭병’에 대한 공동연구 소식에 대해 누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일 것인지 생각해본다. 아마 ‘루게릭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환자나 그 가족이 아닐까.


근육병이란 근육의 힘이 서서히 약해져 결국엔 모든 일상생활을 남에게 의지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질병이다. 근육병환자의 대부분이 7세와 13세 사이에 다리 근육이 굳어져 걷지못하게 되고 15세와 18세 사이에는 혼자힘으로 밥을 먹을 수 없어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하며 25세 정도에는 사망에 노출되는 무서운 질병이다. 많은 경우 가족 중 한명의 근육병환자가 생길 경우 유전적인 요인으로 다른 가족 중에서도 발병할 가능성이 많아 가족모두가 고통받는 경우가 빈번하다.


지난 2002년 1월 희귀난치성질환인 근육병환우들 중 가족의 돌봄을 받지못하는 불우한 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기 위해 ‘더불어사는 집’을 개원해 4년째를 맞이한 이태훈목사. 그 역시 근육병을 앓고 있는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이다.


이태훈목사가 ‘더불어사는 집’을 시작하게 된 계기 역시 그의 두 아들 때문이다. 이목사가 처음 사역을 시작한 곳은 전남 진도면에 있는 섬 상조도 위치한 상조도침례교회였다.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결혼을 했고 큰아이 충만(14세)을 낳았다.

우연히 큰아들 충만이가 아파 들렀던 병원에서 아이의 간수치가 너무 높다는 결과를 받아들고 서울의 큰 병원을 찾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이가 근육병이라는 생소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0개월 뒤 뱃속에 있던 둘째아이 충은이 역시 같은 근육병을 앓고 있다는 판정을 받게 되면서 이목사는 사역이고 뭐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절망감만 들었다고 한다.


그때 이후 이목사와 두 아이들의 끝을 알 수 없는 힘겨운 병원생활을 시작되었다. 근육병이 희귀병인터라 국내에서는 서울 영동세브란스병원 한 곳에서만 근육병환자들의 운동과 치료가 가능했다. 매주 두 번씩 아들들의 치료를 위해 다니기 시작한 병원에서 이목사는 비슷한 처지의 근육병을 앓고 있는 환우와 가족들을 만나면서 아들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잃어버렸던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자기가 앓고 있는 무거운 병마에 눌려 항상 어두운 표정으로 지내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것이 ‘근육병가족선교회’이다. 이목사는 ‘근육병환우선교회’를 통해 병마에 몸과 마음 모두 고통받는 환우들과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을 시작했다. 환우들이 집에서도 물리치료를 할 수 있도록 물리치료과정을 비디오에 담아 환우와 가족들에게 나눠주면서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근육병환우선교회’를 통해 환우들과 환우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봉사를 하던 이목사가 본격적으로 ‘더불어사는 집’ 사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근육병가족선교회를 통해 목욕을 도와달라는 환우의 전화를 받고 봉사를 위해 방문한 집에서 만난 근육병을 앓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근육병은 심해지면 온몸이 막대기처럼 말라가게 되고 숨조차 혼자 힘으로 쉴 수 없을 정도가 된다. 이목사가 봉사를 위해 방문한 집 아이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던 것. 그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근육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두자녀의 미래의 모습을 발견하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목사의 마음 한켠에서는 ‘더불어사는 집’사역을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두자녀의 병수발로 이미 힘겨울대로 힘겨웠던 아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개월 동안의 설득 끝에 아내를 설득한 그는 방한칸짜리 ‘더불어사는집’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 시작한 ‘더불어사는 집’을 위해 이목사가 가진 돈은 단돈 300만원. 하지만 적은 액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목사에게는 “내가 문을 열면 채우리라”라는 말씀을 통해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고 ‘더불어사는 집’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근육병환우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다.


사실 ‘더불어사는 집’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한 아이들을 위한 것은 육체의 돌봄보다도 마음의 돌봄이 더 필요했다. 아이들은 오랜 투병생활을 거치는 동안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돌봄받기위해 들어간 요양시설에서조차도 냉대받기 일쑤였다.


“아버지가 나를 버렸어요”, “3년동안 일반요양시설에 있었는데 마치 지옥 같았어요”라고 호소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목사는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런 노력이 계속되자 처음 들어올 때는 원망과 불평만 가득한 마음으로 들어왔던 아이들의 마음에 “아! 나도 살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의 빛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목사는 ‘더불어사는 집’이 기존의 요양원과 같은 시설이 아님을 강조한다. “아이들에게도 이곳은 환자를 위한 시설이 아니라 어려움을 딛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삶의 공동체가 되어야한다고 항상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이목사는 환우들에게 틈만 나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찾으라고 가르친다. 반대로 ‘더불어사는집’이 근육병환자들만을 위한 공간만은 아님을 이야기한다.


“환우들을 섬기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오는 많은 분들이 환우들의 밝은 모습을 보고 더 도전받고 돌아갑니다. 사랑과 베품의 기회를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거죠”라며 고통 속에서 찾는 역설적 희망을 이야기하며 이목사는 미소짓는다.


‘더불어사는 집’은 이제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현재 ‘더불어사는 집’에는 19명의 환우가 머물고 있지만 보건복지부에 조건부신고시설로 등록되어 있다. 조건부신고시설이라는 말은 일단 유예기간을 가지지만 최종적으로 계속 존립하기 위해서는 보건복지부가 제시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다면 없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이목사는 이것에 대해 비관적이지 않다.


“‘더불어사는집’을 시작한 후로 한번도 재정적인 문제로 이 사역을 포기할뻔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 사역을 시작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확신했다.


이땅이 고통받는 근육병환자들에게 가족으로서 교회로서 신앙 공동체로서 한줄기 희망의 빛줄기가 되어준 ‘더불어사는집’. 행복할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사는 집 http://mdfm.or.kr/032-555-860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